감독
마이클 베이 Michael Bay

주연
벤 애플렉....레이프 맥콜리
Ben Affleck....Rafe McCawley
조시 하트넷....대니 워커
Josh Hartnett....Danny Walker
케이트 베킨세일....에블린 스튜어트
Kate Beckinsale....Evelyn Stewart
큐바 구딩 주니어....도리스 밀러
Cuba Gooding Jr.....Doris Miller
알렉 볼드윈....지미 둘리틀
Alec Baldwin....Jimmy Doolittle
윌리엄 리 스코트....빌리
William Lee Scott....Billy
존 보이트....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Jon Voight....Franklin Delano Roosevelt
콤 피오르....허즈번드 E. 키멀
Colm Feore....Husband E. Kimmel
댄 애크로이드....제시 서먼
Dan Aykroyd....Jesse Thurman
톰 사이즈모어....얼 시스턴
Tom Sizemore....Earl Sistern
그렉 졸라....안소니 R. 푸스코
Greg Zola....Anthony R. Fusco
유언 브렘너....레드
Ewen Bremner....Red
제임스 킹....베티
James King....Betty
캐서린 켈너....바바라
Catherine Kellner....Barbara
제니퍼 가너....산드라
Jennifer Garner....Sandra
마이클 섀넌....구즈
Michael Shannon....Gooz
매튜 데이비스....조
Matthew Davis....Joe
마코....야마모토 이소로쿠
Mako....Isoroku Yamamoto

(스포일러가 아주 약간 있지만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에블린과 레이프

[진주만]은 하나의 대하 드라마인 척 하지만 사실은 세 편의 영화가 엉성하게 연결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첫번째 영화는 전쟁으로 얽힌 삼각 관계를 중심으로 한 2차 세계대전 러브 스토리이고, 두번째 영화는 진주만 공습을 다룬 [도라 도라 도라] 풍의 전쟁 역사물이며, 세번째 이야기는 지미 둘리틀과 도쿄 폭격대를 주인공으로 한 액션 영화입니다. 러닝 타임 세 시간에 가까운 영화가 나온 것도 당연합니다. 모두 별개의 장편 영화가 되어도 아무런 문제없는 이야기들이거든요.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테네시 출신의 단짝 친구인 레이프와 대니입니다. 레이프는 간호사인 에블린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만 영국에서 실종되고 말죠. 레이프가 죽은 줄 아는 에블린과 대니는 더듬더듬 사랑을 시작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죽은 줄 알았던 레이프가 살아 돌아옵니다.

전형적인 2차 세계대전 로맨스죠? 그리고 이 홈페이지에 자주 들르시는 분들은 제가 2차 세계대전 로맨스에 아주 관대하다는 사실쯤은 아실 겁니다. 전 모든 2차 세계대전 로맨스가 다 좋습니다. 진짜 오리지널 2차 세계대전 로맨스는 [사랑의 종말]처럼 폭탄이 떨어지는 런던이 무대여야 하겠지만 [My Foolish Heart]처럼 전장에 남자들을 보낸 여자들 이야기여도 상관 없어요. 사실 줄거리가 아주 뻔해도 전 불평하지 않습니다. 원래 로맨스란 진부한 법이고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닌 당시의 분위기인 걸요.

[진주만]의 로맨스가 살리지 못했던 것도 바로 그 분위기입니다. 전쟁의 불안함이 싸구려 위스키처럼 스며든 그 독한 로맨스의 맛 말이에요. 아니, 마이클 베이는 기초적인 '로맨스'도 살리지 못합니다. 아무리봐도 로맨스는 그의 놀이터가 아니었어요. [진주만]의 캐릭터들은 얄팍하기 그지없고 감정은 일차원적이며 로맨스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정서적 교류도 없습니다. 로맨스 영화가 내세울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진주만]은 로맨스 영화가 아닙니다. 로맨스의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지요. 아니, [진주만]이 흉내내는 건 로맨스 영화가 아닐지도 몰라요. 이 영화의 삼각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윌리엄 웰먼의 [날개]를 연상시키니까요.

더 큰 문제는 이 로맨스가 영화 속에서 다른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론만 따진다면 [진주만]의 로맨스는 [타이타닉]의 로맨스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공의 연애담을 역사적인 사실 속에 비벼넣어, 그 역사적 사건의 아픔을 보다 직접적으로 와닿게 하는 것이지요. 마땅히 '사건'과 '로맨스'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합니다.

우린 종종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 각본을 비웃지만, 적어도 그 영화에서 둘은 훌륭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랜달 월레스의 각본에서 로맨스와 실제 역사는 철저하게 따로 놉니다. 둘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하필 그 때 진주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할 때 꽤 심한 고생을 하긴 하지만 전쟁은 그들의 로맨스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진주만 공습은 한창 진행되던 로맨스의 끔찍한 간주곡에 불과해요. 그렇다면 왜 러브 스토리가 들어갔던 거죠?

진주만 공습

웬만한 길이의 케이트 베킨세일 영화 하나가 끝났을 법한 시간이 흐르면 드디어 공습이 시작됩니다. 종종 앞에 흐르는 로맨스와 아무 상관 없이 무성의하게 툭툭 삽입되던 실제 역사가 드디어 폭발한 것이죠. 두번째 영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은 [진주만]이 제2의 [도라 도라 도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영화는 실제 역사를 사실적으로 구축할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제대로 된 역사를 보여줄 생각 따위도 없죠. 꽤 큰 비중으로 실존 인물들을 내세워 역시 거의 영화 하나 길이의 스토리를 끌어가면서도 말입니다. 이런 식이니 여기서 '역사 인식'과 같은 걸 바라는 건 무리입니다.

대신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하늘을 빽빽하게 채운 제로 전투기들이 정박 중인 미국 군함들을 박살내는 스펙터클입니다. 대부분 관객들이 보러 온 것도 바로 이런 구경거리죠. [진주만]은 구경거리가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이 구경거리는 말 그대로 텅 비었습니다. 바보스럽다기보다는 그냥 텅 빈 것이지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미국 영화가 흥행용 무기로 내세운 것이 미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패배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관객들은 무시무시한 대 파괴가 일어나는 동안 어느 편이 어느 편을 부수는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냥 파괴 자체의 흥분을 즐기는 것이지요. 덕택에 한창 흥분하다보면 지금 보는 장면이 '패배'에 대한 것이라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그래도 마이클 베이와 랜달 월레스는 이 영화를 패배에 대한 영화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진주만 공습 에피소드의 후반부는 우리의 주인공 레이프와 대니가 용감하게 전투기를 날려 제로 전투기를 때려잡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들의 액션을 따라가다보면 좀 황당해져요. 한창 제로 전투기 잡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일본군 진영으로 바뀌고 그 쪽에서는 극히 소수의 희생만으로 작전을 성공시켰다고 선언하니까요. 뭐야? 당시 분위기를 보면 레이프와 대니가 날아온 제로 전투기들의 반은 때려잡은 것 같았으니 말입니다.

진주만 공습이 끝났으니 영화도 끝난 것일까요? 천만에요.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들은 이 영화를 절대로 패배에 대한 영화로 만들 수 없었거든요. 일단 미국에 첫 패배를 보여주었으니 일본군도 그만큼 당해야 했습니다. 이들이 택한 세번째 이야기는 지미 둘리틀과 도쿄 라이더즈의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주인공 레이프와 대니도 그들의 일원이었고요.

도쿄 라이더즈의 이야기는 괜찮은 존 밀리어스 영화가 될 수 있는 소재입니다. 폭격 자체는 대단치 않았지만 창의적인 작전이었고 역사적 가치도 꽤 있는 편입니다. 큰 영화는 안되겠지만 그럴싸하게 재미있는 영화 하나는 나올 수 있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여러모로 전체 영화를 망치고 있습니다. 우선 영화의 균형을 깨트립니다. 관객들이 보러온 것은 진주만 공습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군더더기입니다. 이런 액션을 덧붙이는 것은 꼭 동시 상영 영화를 하나 더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도쿄 공습을 이용해서 질질 끌어온 삼각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속셈이 너무 노골적이라 공습 자체의 진지함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다고 그게 로맨스를 진짜 로맨스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요. 물론 우리 같은 외국인 관객들에게는 '미국을 건드리면 가만 안둬!'라는 노골적이고 간단한 메시지가 한마디로 꼴사납게 보이기도 하죠. 패배의 한가운데에서 그나마 나올 수 있었던 자기 성찰의 기회도 빼앗아 버렸으니 예술적으로 조금 더 성숙할 기회도 사라진 셈이고요.

그럼 [진주만]은 장점이 전혀 없는 영화일까요? 그런 영화는 없습니다. [진주만]에도 나름대로의 장점은 있습니다. 일단 이 영화는 생각만큼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세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을 별 무리없이 버틴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상당한 성과지요. 게다가 특수 효과는 꽤 좋고 공습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배우들 역시 이 영화의 단점은 아닙니다. 벤 애플렉, 케이트 베킨세일, 조시 하트넷 모두 괜찮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좋은 대사와 스토리만 있었다면 이들은 모두 훨씬 더 잘 빛날 수 있었던 배우들입니다. 존 보이트나 댄 애크로이드, 톰 사이즈모어와 같은 배우들도 괜찮은 조연 연기로 뒤를 받혀주기도 하고요. 제임스 킹이 꽤 그럴싸한 배우로 변신한 걸 보는 것도 즐거웠고, 유언 브렘너의 미국인 변신도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진주만]은 여러모로 불발인 영화였습니다. 근사한 폭격 장면으로 스펙터클을 안겨주기는 했을지 몰라도 같이 보여주겠다고 한 드라마, 로맨스, 역사가 모조리 파탄이었으니 결코 성공한 영화는 아니죠. 욕심이 능력에 비해 너무 컸다고 할 수밖에 없군요. (01/06/05)

DJUNA

기타등등

케이트 베킨세일이 마지막 나레이션에서 미국을 '우리'라고 칭하는 걸 듣는 건 조금 이상하더군요. 베킨세일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미국 영어로 대사를 읊어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