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Guillermo del Toro

주연
이바나 바케로....오펠리아
Ivana Baquero....Ofelia
세르지 로페스....비달 대위
Sergi López....Capitán Vidal
마리벨 베르두....메르세데스
Maribel Verdú....Mercedes
아리아드나 힐....카르멘
Ariadna Gil....Carmen
더그 존스....판
Doug Jones....Fauno
알렉스 앙굴로....의사
Álex Angulo....Doctor
로제 카사마오르....페드로
Roger Casamajor....Pedro
세사르 베아....세라노
César Vea....Serrano

판과 오펠리아

[판의 미로]는 엄격하게 분리된 두 세계들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 1번은 판과 요정들이 존재하는 환상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바깥 세계에 나갔다가 육신과 기억을 잃어버린 지하세계의 공주가 양복장이의 딸로 다시 태어나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하지요. 세계 2번은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 독재가 시작된 1944년의 스페인입니다. 여기서 사악하고 사디스틱한 비달 대위는 아직도 게릴라들이 남아 있는 숲속에서 잔인무도한 소탕작전을 벌이죠.

이 두 이야기는 어떻게 만날까요? 비달 대위는 최근에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저번 결혼에서 낳은 딸 오펠리아가 바로 그 공주님인 것입니다. 아들이 태어날 때는 반드시 아버지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비달은 아내와 오펠리아를 억지로 숲으로 끌고 왔고, 오펠리아는 숲에 도착한 바로 그 날 요정에 이끌려 고대의 미로 정원에 들어가고 거기서 판을 만나 자신의 신분과 임무에 대해 듣게 되지요.

세계 1번은 오펠리아의 환상일까요? 그렇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오펠리아는 동화책에 푹 빠진 어린 소녀이고 세계 1번은 그런 아이가 고대의 폐허를 보고 상상해낼만한 곳이니까요. 세계 2번에서 판과 요정들을 보는 사람이 오펠리아밖에 없기도 하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판의 미로]는 참 끔찍한 이야기죠. 다행히도 기예르모 델 토로는 2번 세계에 약간의 틈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후반부에서 오펠리아가 감금된 방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건 판이 준 마법의 분필이 없으면 설명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1번 세계의 현존성을 부르짖어도, 이 영화는 그렇게 읽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역사의 무게가 너무 무겁죠. 관객들에게 현실은 내전의 커다란 상처를 안고 여전히 남은 전쟁의 관성으로 학살과 고문을 이어가고 있는 2번 세계입니다. 1번 세계는 2번 세계의 처절한 비극에서 탈출하기 위한 환상적인 도피처에 불과합니다. 그 세계가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요. 바로 그 한계가 이 영화의 궁극적 비극성을 만들어내죠.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델 토로의 전작 [악마의 등뼈]와 비교할 텐데, [판의 미로]는 [악마의 등뼈]만큼 현실과 환상 세계를 꼼꼼하게 엮는 영화는 아닙니다. 더 냉정하고 단순해요. 더 큰 증오심을 품고 있기도 하고요. 일단 선악구분이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비달 대위는 악이고 오펠리아나 오펠리아의 엄마 카르멘, 게릴라, 게릴라를 돕는 가정부 메르세데스나 의사는 피해자거나 선입니다. 이 경계선을 넘어서는 사람들은 없어요.

그 때문에 영화의 드라마와 캐릭터들은 이전보다 조금 얇게 느껴집니다. 우린 [악마의 등뼈]의 악당인 하신토를 증오하면서도 그의 인간적인 갈망과 동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비달 대위는 그냥 악 자체입니다. 순수한 부계 혈통에 대한 끔찍한 집착은 심심풀이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더 복잡한 인물이 되는 건 아니죠. 그의 악마적 기질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스페인 내전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묘사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요.

오펠리아가 1번 세계에서 겪는 모험도 단순한 전형성의 함정 입구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습니다. 오펠리아의 모험은 거의 수학적으로 짜여진 동화 나라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요. 극도로 형식적이고 주인공의 자유의지가 개입될 구석도 별로 없지요. 심지어 오펠리아가 중간에 저지르는 실수도 형식적입니다. 어리석거나 약해서 저지르는 게 아니라 당연한 스토리 전개를 위해 작가에게 끌려가다시피해서 저지르는 거죠.

그러나 이 단순무식한 묘사는 영화의 이야기에 더 강한 힘을 불어넣어주기도 합니다. 특히 1번 세계와 2번 세계가 만나고 2번 세계의 가차없는 폭력이 1번 세계에 가해질 때는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마술적 존재들 중 몇 명은 장르의 품 안에서 해피엔딩을 맞지 못해요.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불에 타 죽거나 그러죠. 1번 세계의 나약함은 은근히 도피의 하늘거리는 허망함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 굵직하고 단순한 두 세계의 대립은 보기보다 논리적입니다. 원래부터 동화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현실 세계의 잔인무도함과 그의 극복이 아니던가요? 쓸데없는 디테일 묘사 없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공포의 근원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는 건 바로 그래서 설득력이 있는 겁니다. 비달 대위도 단순하긴 하지만 결코 비현실적인 인물은 아니에요. 실제 세계의 사람들은 허구 속 캐릭터들보다 더 단순하고 혐오스럽죠.

개별요소들에 대한 의견은 엇갈릴 수 있지만, [판의 미로]가 잔인무도한 만큼이나 아름다운 영화라는 점은 쉽게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비달 대위가 가하고 당하는 폭력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 아름다움이 기예르모 델 토로 특유의 불쾌하면서도 아름다운 환상 세계만큼이나 주연 배우 이바나 바케로의 위태로운 아름다움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도 밝혀두어야 할 것 같군요. (06/11/21)

DJUNA

기타등등

오래간만에 본 아리아드나 힐. 하지만 병약하고 겁에 질린 임산부 역으로 나온 이 사람을 보는 건 좀 슬프군요. 처음에 못 알아볼 정도였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