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젠가 통신망에서 어떤 분이 쓴 [사랑의 별장 The Talk of the Town]에 대한 글을 읽다가 놀란 적 있어요. 꽤 영화 지식이 밝으신 분인데도 진 아서를 [셰인 Shane]의 주인공 엄마로만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전성기 클래식 헐리웃 영화들이 우리나라 관객들한테 얼마나 덜 알려져 있는가에 대한 또하나의 예였지요.

하지만 요새는 사정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대부분 EBS의 [일요 시네마] 때문입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지난 몇 개월 동안 방영한 진 아서의 영화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도시로 간 디즈 씨 Mr. Deeds Goes to Town],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 Only Angels Have Wings], [사랑의 별장], [한 여자와 두 남자 The More the Merrier]... 당시 스크루볼 코미디들을 방영하다보니 어쩌다 계속 겹친 건지, 다른 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사정이 어떻건 진 아서의 팬들에겐 반가운 일이지요.

2.

진 아서의 약력을 쓰려면 시작부터 고민을 해야 합니다. 도대체 언제 태어났는지도 확실치 않으니까요. 데이터베이스마다 출생년이 달라요. 1900년, 1905년, 1908년... 하지만 1900년이 가장 신빙성이 높습니다. 생일은 보다 확실하고요. 10월 17일입니다.

진 아서가 맨 처음 시작한 직업은 모델이었지만 곧 헐리웃으로 자리를 옮겨 배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서가 맨 처음 출연한 영화는 존 포드가 감독한 [Cameo Kirby (23)]라는 무성 영화였다고 해요.

그 뒤도 사정은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거의 10년에 걸친 무성 영화 기간 동안 아서가 찍은 영화들 중 쓸만한 건 별로 없습니다. 고약스러울 정도로 따분하게 타이프캐스팅된 역들이 대부분이었지요(서부극에 나와서 "살려줘요!"하고 외치는 여자들을 상상해보세요.) 파라마운트와 계약한 초기 유성 영화 시대들의 작품도 다를 게 없었어요. 32년, 실망한 아서는 영화 일을 그만두고 브로드웨이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34년 아서는 헐리웃으로 돌아왔고 콜롬비아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슬슬 이 배우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죠. 조지 스티븐즈, 프랭크 카프라, 하워드 혹스, 존 포드와 같은 거물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고 제임스 스튜어트, 게리 쿠퍼, 케리 그랜트와 같은 막강한 공연 배우들도 깔려 있었습니다.

당시 유행도 아서를 도왔습니다. 카프라가 '발명한' 스크루볼 코미디는 아서에게 딱 맞는 장르였지요. 아서의 꽥꽥거리는 개구리 목소리도 이 장르에선 매력이 되었습니다.

슬슬 이 사람의 캐릭터가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현실적이고 용맹하며 입에 발동기라도 단 듯한 막강한 말발의 스크로볼 코미디 여주인공 말입니다. 3, 40년대를 거치며 끝없이 이어지는 성공작들은 아서를 당시 가장 뛰어난 코미디 배우 중 한 명으로 각인시켰습니다.

하지만 콜롬비아와의 계약이 끝나자 진 아서의 경력은 잦아들었습니다. 그 뒤로 아서가 출연한 영화는 두 편밖에 없죠. [A Foreign Affair]와 [셰인]이 그것입니다. 모두 훌륭한 작품이지만 아서의 영화 경력은 그것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아서의 전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60년대 초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뮤지컬 [피터 팬]이었습니다. 아서는 그 때 타이틀 롤인 피터 팬을 연기했었습니다.

한 번의 기회가 더 찾아오긴 했습니다. 60년대에 [진 아서 쇼 The Jean Arthur Show]라는 텔레비전 시리즈에 출연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시리즈는 11편으로 끝났고 그게 아서의 마지막 연기 작품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서는 그 뒤로 대학에서 연기를 지도하며 남은 경력을 이어갔습니다.

아서는 72년에 은퇴했고 그 뒤로 캘리포니아 카멜(한 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시장 노릇을 했던 곳입니다)에서 살다가 91년에 사망했습니다.

3.

영화를 통해 진 아서의 똘똘하고 야무진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은 진 아서의 실제 모습에 종종 기겁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캐릭터 배우들에게 영화 속의 이미지는 실제 삶의 반영이지만 진 아서에게는 아니었습니다.

실제 아서의 성격은 영화 속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아서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하고 수줍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죠. 카메라 앞에서 용감무쌍한 카프라의 여자 주인공을 연기하다가도 카메라가 멈추기만하면 토했다느니, 팬들 근처에만 가도 공포스러울 정도로 히스테리컬해졌다느니... 아서의 무대 공포증 때문에 배우를 바꾼 연극도 있었습니다. ([Born Yesterday]가 바로 그 작품으로, 당시 대타로 나선 배우는 주디 홀리데이였습니다. 홀리데이는 이 연극의 영화 버전으로 아카데미 상을 받았지요.)

그렇다면 아서가 연기한 스크린 위의 그 용맹한 여성들은 다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아마도 이 배우의 프로페셔널리즘과 재능이 만들어낸 순수한 창조물이었겠지요.

4.

아서는 두 번 결혼한 적이 있습니다. 줄리언 앵커라는 사람과 한 첫번째 결혼은 하루만에 무효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작자인 프랭크 로스와는 꽤 오래 갔습니다. 17년이나 끌었으니까요.

이 배우에 대한 소문 중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아서가 역시 피터 팬을 연기했던 여자 배우 메리 마틴과 애인 사이였다는 것이겠죠.

참, 아서의 머리는 진짜 금발이 아닙니다. 유성 영화 시대가 되자 원래의 검은 머리를 금발로 바꾸었어요. 그 때문에 이 사람의 무성 영화 시절 때 사진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보입니다.

존 올리어라는 사람이 몇 년 전에 아서의 전기를 썼습니다. 제목 참 그럴싸해요. [Jean Arthur : The Actress Nobody Knew.]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99/09/15)

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