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Christopher Nolan

주연
가이 피어스....레너드 셸비
Guy Pearce....Leonard Shelby
캐리-앤 모스....나탈리
Carrie-Anne Moss....Natalie
조 판톨리아노....테디
Joe Pantoliano....Teddy
마크 분 주니어....버트
Mark Boone Junior....Burt
스티븐 토볼로스키....새미 잰키스
Stephen Tobolowsky....Sammy Jankis
조르자 폭스....캐서린 셸비
Jorja Fox....Catherine Shelby
해리엇 샌섬 해리스....잰키스 부인
Harriet Sansom Harris....Mrs. Jankis
칼럼 키스 레니....도드
Callum Keith Rennie....Dodd
래리 홀든....지미 그랜츠
Larry Holden....Jimmy Grantz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너드

레너드 셸비는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한 악당을 찾아 헤매는 보험조사원입니다. 그는 이름없는 모텔방을 전전하며 아직도 툭하면 튀어나오는 죽은 아내의 기억으로 괴로워합니다. 그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복수에 대한 갈망뿐입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레너드 셸비는 전형적인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한가지 면에서 전적으로 다릅니다. 아내가 살해당하던 밤 범인에게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뒤로 그는 심각한 기억 장애에 걸렸습니다. 그는 사고가 일어났던 날까지의 과거는 별 무리 없이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의 새 기억은 10분 이상 지속하지 못합니다. 필사적으로 집중해야 15분, 정신이 산만해지면 5분도 지속하지 못하죠.

이런 기억 장애는 정말로 존재합니다. 저도 다큐멘터리에서 몇 번 본 적 있고, 심리학 교과서에서도 몇몇 예를 언급한 걸 읽은 적 있으니까요. 과연 그런 사람들이 레너드처럼 용맹한 액션을 벌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를 위해 지어낸 장애는 아니죠.

[메멘토]가 이런 장애를 다룬 첫번째 영화는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탐정 포그와 애완견 애꾸]라는 제목으로 출시된 코미디 [Clean Slate]도 비슷한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다루고 있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 포그는 잠만 들면 기억을 잃어버리는 사립 탐정입니다. [메멘토]에 사용되는 몇몇 극적 도구들은 이 영화에서 먼저 사용되었던 것들입니다.

[메멘토]는 [Clean Slate]보다 훨씬 복잡한 영화입니다. 영화는 흑백인 과거 장면과 컬러인 현재 장면으로 나뉘며, 이 둘은 번갈아 진행됩니다. 그런데 흑백 장면이 정상적인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데 반해, 컬러 장면은 진행 시간의 역순으로 흘러가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맨 처음으로 접하는 장면은 실제로 사건의 종말인 것입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점점 과거로 돌아가고 결국 흑백 장면과 컬러 장면은 결말의 한 점에서 만나게 됩니다.

정신없게 들리지만 이런 구성은 논리적으로 지극히 타당합니다. 설정상 레너드의 삶은 10분짜리 미스터리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미스터리의 해답은 늘 그의 과거에 있지요. 영화는 조금씩 과거로 넘어가면서 앞에 제시되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대신 새로운 미스터리를 제시합니다.

컬러 장면이 미스터리와 해답을 번갈아 제공하며 관객들을 최종 진상으로 끌고가는 동안, 흑백 장면은 키 역할을 합니다. 헛갈리기 쉬운 관객들을 위해 내용을 정리하고 사태를 설명해주는 기능을 하죠. 물론 이 장면 역시 컬러 장면의 복선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만.

연속되는 미스터리와 해답은 충격적이기도 하고 희극적이기도 하며 처절하기도 합니다. 정신없이 달리던 레너드가 '왜 내가 이렇게 달리고 있나?'라며 궁금해 할 때 관객들은 신나게 웃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내가 죽기 전의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기억을 잃기 전에 아내의 소유물들을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는 걸 알게 되면 관객들은 순식간에 이 딱한 남자를 동정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분위기의 전환이 꽤 적절하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메멘토]는 연속되는 퀴즈집보다 훨씬 다채로운 정서적 느낌을 유지합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분위기가 아니라 미스터리 자체입니다. [메멘토]의 미스터리는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습니다. 레너드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겉보기와는 다릅니다. 심지어 레너드 자신도 그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죠. 레너드가 기억 대신 의지하는 것은 그가 온 몸에 새겨놓은 문신과 메모, 폴라로이드 사진들인데, 과연 이것들을 얼마나 믿어야 할까요? 아무리 자기가 사진을 찍고 자기 필체로 메모를 남겼다고 해도 말입니다.

미스터리가 모양이 잡힐수록 영화의 주제는 점점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옮아갑니다. 당연히 기억과 자아라는 대상이 주제가 될 수밖에 없지요. 레너드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 나는 레너드 셸비이고 어쩌구 저쩌구..."라고 읊어대자, 테디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네가 알고 있는 건 과거의 너일뿐이야. 이제 너 자신에 대해 수사해볼 때가 된 것 같지 않아?"

와우, 정말 그렇군요. 그리고 정말 이 영화는 10분마다 다시 태어났다가 죽어간 수많은 레너드들 중 몇 명이 마지막 레너드를 음모로 몰고 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레너드들은 사고 직후 태어난 최초의 레너드이기도 하죠.

결국 같은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 수많은 남자들은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짧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끔찍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씻어가 버릴 세월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아냐, 세월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씻어지지 않는 기억의 무게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월 속에서 그의 이전 기억도 서서히 탈색되고 변형된다면 그 기억에 바탕을 둔 그의 감정은 과연 진실일까요?

나중에 생각해보시길. [메멘토]는 형이상학 교과서가 아니므로 해답 따위는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억의 미로 속을 방황하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나 자신의 기억과 자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메멘토]는 굉장히 알찬 영화입니다.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잊혀지는 요새 액션 영화들과는 달리 끝도 없이 머리 속에 남아 관객들에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하니까요. (01/07/06)

DJUNA

기타등등

이 영화의 설정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건 10분밖에 기억못하는 남자가 어떻게 자기에게 그런 증상이 있다는 걸 아느냐는 거죠. 실제 환자들에게 설정이 그처럼 노골적으로 딱딱 맞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직접 그런 사례를 연구하지 않고서는 제가 어떻게 참견할 수 있는 게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