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클로드 샤브롤 Claude Chabrol

주연
스테판느 오드랑....엘렌 레니에
Stéphane Audran....Hélène Régnier
장-피에르 카셀....폴 토마
Jean-Pierre Cassel....Paul Thomas
미셸 부케....뤼도빅 레니에
Michel Bouquet....Ludovic Régnier
아니 코르디....피넬리부인
Annie Cordy....Mrs. Pinelli
장-클로드 드로....샤를르
Jean-Claude Drouot....Charles
장 카르메....피넬리 씨
Jean Carmet....Mr. Pinelli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엘렌

[파멸]은 주인공 엘렌이 마약중독자 남편 샤를르한테서 도망치면서 시작됩니다. 남편 때문에 다친 아들을 병원에 입원시킨 엘렌은 이혼을 결심하지만 돈많은 부자인 시댁에서는 교육도 제대로 못받고 왕년에 누드 댄서이기까지 했던 여자에게 손자를 맡길 생각 따위는 없죠. 시아버지 뤼도빅은 어떻게든 엘렌의 흠을 찾아내기 위해 타락한 변호사인 폴 토마를 고용하고 그는 엘렌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하숙집에 잠입합니다. 필요한 증거를 찾을 수 없자, 토마는 엘렌을 마약 중독자로 몰아 붙이기로 마음먹습니다.

[파멸]에는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들을 특징짓는 거의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히치콕의 영향, 영어권 추리소설 원작, 위선적인 부르주아 비판, 차디찬 블랙 유머, 스테판느 오드랑... 그러나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샤브롤의 다른 작품들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건 샤브롤이 이 영화에서 그가 이전 작품에서 그렇게 자주 시도한 적 없던 과격한 테크닉을 시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작자 샬롯 암스트롱이 샤브롤의 영화 안에 얌전히 묻힐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암스트롱의 원작 [The Balloon Man]을 읽어본 적 없지만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들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있고 샤브롤이 그렇게까지 원작을 심하게 뜯어 고치는 감독이 아니라는 것도 알거든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캐릭터와 설정의 단순함입니다. 샤브롤의 단골 소재는 우아한 예절과 교양 속에 묻혀 있는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의 어두운 욕망입니다. 그의 영화들은 냉소적인 계급 비판이기도 했지만 그 세계의 예절과 교양에 깊이 빠져 있기도 했습니다. 성공적인 샤브롤의 악당들은 종종 위험한 만큼 매혹적인 존재들이었지요.

하지만 [파멸]엔 그런 섬세한 매혹 따위는 없습니다. 이 영화의 악당인 뤼도빅 레니에는 돈에 눈이 먼 사악한 자본가에 불과합니다. 그가 고용한 변호사 폴 토마 역시 양심 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은 악당이고요. 이들은 모두 김수현 연속극에 나와도 통할만큼 극단적입니다. 하긴 극단적인 건 주인공 엘렌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결점 하나 없는 숭고한 여자 주인공이니 말이에요. 당연히 샤브롤 풍의 은밀한 비판 따위는 찾을 수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나쁜 부자들이 부글거리는 영화인 걸요.

더 재미있는 건, 설정의 극단성이 곧바로 과격한 스토리 전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한 번 보세요. 사악한 악당이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은 여자 주인공을 미치광이 성추행범으로 몰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하숙집 사람들에게 바람둥이 마약중독자라는 거짓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정신지체자인 하숙집 딸을 납치해 여자 친구에게 성추행하게 한 뒤 그걸 여자 주인공에게 뒤집어 씌우려고까지 하죠. 이 설정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면 클루조의 [디아볼릭] 뺨칠만큼 암담할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악한 악당 폴 토마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똑똑하지 않고 엘렌의 주변 사람들 역시 그렇게까지 멍청하거나 사악하지 않거든요. 엘렌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사건을 맡아주는 변호사나, 갈 곳 없는 엘렌에게 자기 하숙집을 소개시켜주는 의사, 자발적으로 미행자의 존재를 알려주는 풍선장수 아저씨, 엘렌을 모함하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연극 배우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토마가 아무리 거짓말을 지어내도 엘렌 주변 사람들은 아들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가난한 여자에 대한 동정심을 버리지 않으며 자칭 시한부인생 환자라면서 늘 신나게 돌아다니는 토마를 의심합니다. 이런 묘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선의와 현명함을 믿었던 [작은 독약병]의 작가에게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덕택에 토마의 음모는 아주 이상하게 흘러가버립니다. 음모는 엄청나게 벌려놨습니다. 하지만 그 중 먹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막판에 가면 그가 쌓아놓은 음모들은 모두 자기한테 떨어져버립니다. 이 영화의 가장 노골적인 희생자는 엘렌이 아니라 폴 토마 자신인 것이죠. 아마 샤브롤의 관심을 끌었던 것도 그 아이러니였을 겁니다. 엄청나게 암담한 서스펜스 물로 위장한 웃기는 어릿광대극을 연출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 말이에요.

덕택에 샤브롤의 블랙 유머는 이전과는 달리 아주 노골적이고 신나는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단 캐릭터들과 설정의 멜로드라마틱함을 극도로 과장합니다. 아마 아마 이들은 암스트롱의 원작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캐리커처들일 거예요. 그러는 동안 늘 점잖고 영화적으로 거의 보수적이기까지 했던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만들어집니다. [파멸]은 초현실적이고 거의 사이키델릭하며 결정적으로 엄청나게 '캠피'한 영화입니다. 특히 마약에 중독된 엘렌이 세 할머니들과 공원을 헤매는 장면을 보세요. 이걸 보면서 정말 어떻게 웃어야 하는 건지요! (03/12/24)

DJUNA

기타등등

얼마 전에 나온 [초콜렛 고마워]도 샬롯 암스트롱의 소설을 각색한 샤브롤 영화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