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첸 루어페이 Chen Jo-fei

칭과 샨

(1)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웬지 이 영화에 대해서는 빨리 빨리 이야기하고 끝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우선 여성 영화제 프로그램에서는 이 작품을 대만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97년에 [젊은 날의 중얼거림]이 나왔으니 이 소개가 사실일 리가 없습니다. 물론 '레즈비언 영화'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젊은 날의 중얼거림]이 무시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3) [세상 끝에서 海角天涯]의 주인공은 두 레즈비언인 칭과 샨입니다(정확한 발음은 확신할 수 없군요.) 칭은 여자 친구와 막 헤어져서 심신이 망가진 상태로 마구 차를 몰다가 화가인 샨을 만납니다. 둘은 샨의 스트레이트 친구네 집에 머물면서 조금씩 관계를 쌓아갑니다. 마침내 칭은 샨을 받아들이지만 첫날 밤을 보낸 다음 날 몰래 뉴욕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4) 대만 레즈비언 세계에 대해 알고 싶다는 기분으로 [세상 끝에서]을 보신 분들은 실망하셨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산중에서 벌어지니까요. 칭과 샨 역시 지독하게 보편적인 인물들입니다. 제가 보기엔 좀 심할 정도지요. 사실 샨을 남자로 바꾸고 칭을 스트레이트로 바꾸어도 이 영화의 줄거리는 거의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5) 부치/펨 관계에 대해 엄청난 반감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칭과 샨의 관계에는 좀 불편한 구석이 있습니다. 특히 샨은 현대 중국/일본 문화권에서 툭하면 남발하는 과묵한 남자 주인공을 지나치게 흉내내고 있어요.

(6) 제가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던 이유가 두 개 더 있었으니... 첫째는... 아, 샨 역의 배우가 어쩜 그렇게 박경림을 닮았던지요.

(7) 두번째 이유는 번역이었습니다. 아마도 영어 자막을 그대로 옮긴 모양인데, 첫판부터 샨이 칭에게 말을 까는 게 영 불편했답니다. 지금까지 전 남녀 주인공들의 종적인 언어 사용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그 끔찍한 상하구조가 이 영화에 그대로 이식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인 남녀 관계와 다를 게 거의 없는 첸과 샹의 관계가 더욱 더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8) 영화를 보면서 계속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칭과 샨의 관계도 그렇지만 일단 배경이 되는 빽빽한 산과 자연 때문에 폐소공포증이 팍팍 들었어요. 제가 철근 콘크리트가 발명된 시대에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01/04/25)

DJUNA

기타등등

영화 초반에 칭이 여권을 잃어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냥 잃어버릴 뿐 그 뒤로는 여권 이야기가 전혀 없군요. 제가 뭔가를 놓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