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조지 아미티지 George Armitage

주연
존 큐삭....마틴 Q. 블랭크
John Cussack....Martin Q. Blank
미니 드라이버....데비 뉴베리
Minnie Driver....Debi Newberry
조운 큐삭....마르셀라
Joan Cussack....Marcella
댄 애크로이드....그로서
Dan Aykroid....Grocer
알란 아킨....오트먼 박사
Alan Arkin....Dr. Oatman
행크 아자리아....스티븐 라드너
Hank Azaria....Steven Lardner

1. 단순 명료한 개념이 꼭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틴 Q. 블랭크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는 원 조크 코미디입니다. 어떻게 보면 [플레이어]에 나오는 헐리웃 제작자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영화일 수도 있죠. "어떤 내용이오, 20 단어 안으로 설명해봐요." "킬러가 동창회 가는 내용인데요." "아하!"

저희가 끌어들인 가상의 제작자들은 개념을 잡았으니 남은 작업은 쉽고 쉽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천만에요. 원 조크 코미디처럼 쓰기 어려운 장르는 결코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내용의 스크립트를 쓰는 중이라고 생각해보세요. '킬러가 동창회 간다'를 한 번 써먹으면 한 10분 쯤 지나갑니다. 여기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남은 1시간 반도 여전히 '킬러가 동창회 간다'로 채워야 한다면?

원 조크 코미디가 성공했다면 그 영화가 정말로 정곡을 찔렀거나 원 조크 코미디를 위장하며 훨씬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는 어떤 영화일까요? 전자 쪽에 가깝습니다.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는 '킬러 동창회 가다'에서 시작해서 '킬러 동창회 가다'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다만 스크립트가 분명한 방향을 잡고 있다는 게 다를 뿐이죠.

2. 킬러 동창회 가다

'킬러 동창회 가다'라는 농담의 포인트는 뭘까요? 그건 프로페셔녈 킬러라는 비현실적이고 '폼나는' 직업의 남자가 동창회라는 일상적이고 산문적인 상황과 충돌한다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루한 동창회를 비현실적인 킬러의 소동에 포함시켜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현실적인 킬러를 산문적인 동창회에 밀어넣어 그 '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현명하게도 영화는 후자를 택했는데, 이 방법은 더 만들어낼 수 있는 농담의 양이 많고 농담의 질도 더 높으며 이야기가 훨씬 다양한 의미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에 비평가들의 점수도 더 딸 수 있으니, 구체화시키는 게 전자보다 조금 어렵다는 것만 빼면 정말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는 이미 산문적인 동창회를 이용하기만 하지 않고 주인공 마틴 블랭크의 삶 자체를 극도로 일상화시켜 그 안에 동창회를 포함시킵니다. 블랭크는 성냥개비를 씹는 주윤발이 아니라 슬럼프에 빠진 전문가입니다. 일은 최근들어 잘 풀리지 않고 라이벌 그로서의 합병 제의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킬러라는 직업은 우리가 사는 험한 세상의 다른 직업들과 별로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 때문에 이 영화의 '킬러'를 자본주의 세계의 무시무시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메타포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거죠.

3. 킬러의 윤리학

재치있게 비틀어진 이 영화의 윤리학은 그런 가능성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줍니다. 블랭크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 라드너의 대사를 한 번 볼까요? "왜 그렇게 성급해? 너는 착한 사람을 죽이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니? 저 녀석이 일을 벌일 때까지 기다려. 그 다음에 그를 죽이면 우리는 착한 사람을 죽인 나쁜 사람을 해치운 착한 사람이 되는 거야." 라드너에게 '옳은 일'이란 '우리가 하는 일' 이상의 의미는 없고 그의 양심을 안전하게 유지시키는 것은 그의 직업이 부여하는 최소한의 규칙 뿐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지 않겠어요? 적극적으로 규칙을 깨야 할 위기에 몰리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윤리적 행동의 기반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우리 삶의 윤리적 가치가 나름대로 독자적인 윤리 체계에 바탕을 둔 킬러나 스파이의 그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어요. "넌 정신병자야!"라고 외치는 데비에게 블랭크가 떠들어 대는 말을 인용해보죠. "정신병자는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지. 하지만 난 아냐. 나는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 이건 '직업'이야." 지상의 기존 윤리와 종종 충돌하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블랭크는 우리만큼 '도덕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윤리적 행동은 직업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를 유지시키는 데에 필요한 것은 단지 적당한 '윤리적 유동성'뿐이죠. 그리고 영화 속의 킬러들만 이런 '윤리적 유동성'을 부여받는 게 아니라는 건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3. 관계 맺기라는 그 어려운 게임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에서 우리가 또 찾아내 읽을 수 있는 것은 '관계맺기'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에 대한 푸념입니다. 바로 코 앞에 있으면서도 핸드폰과 스피커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 대한 약간 진부한 묘사와 자신이 킬러라는 걸 광고하고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상황들("직업이 뭔가?" "프로페셔널 킬러인데요." "흠, 성장하는 사업이군.")을 넘어서면 블랭크와 그의 정신분석의 오트만 박사 사이의 황당한 관계가 등장합니다. 하여간 겁에 질려 죽어라 숨으려고만 드는 오트만 박사에게 거의 협박조("난 당신이 어디 사는 지 알아요!")로 충고를 강요하는 블랭크의 모습에는 거의 처절하기까지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옛 여자친구 데비와의 관계 회복입니다. 사랑은 뭐든지 해결한다? 글쎄요. 그래도 일주일에 5일씩이나 꿈 속에 나타나는 여자를 만나서 다시 꼬시는 데에 성공했으니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4. 배우들

큐삭 남매는 모두 재미있고 재능있는 배우들이지만 그 능력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피지 못했죠. 최근들어 조운은 [인 앤 아웃]으로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올랐고, 존은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와 [콘 에어]등의 영화로 서서히 자기 주가를 인정받는 중이지만 모두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어요. 하여간 이 영화에서 큐삭 남매는 모두 좋습니다. 큐삭은 킬러라는 비현실적인 직업에 현실감을 부여했고 그것을 아주 재치있게 실제 삶과 연결시키는 데에도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기술적인 요소를 다 떠나더라도 그가 연기하는 마틴 블랭크는 아주 귀엽습니다. 블랭크의 비서 마르셀라를 연기하는 조운도 언제나처럼 훌륭하고요.

두 큐삭(사실은 세 큐삭입니다. 동창회 때 데비의 옷에 술을 엎지르는 동창이 바로 앤 큐삭이니까요. 누가 가족 아니랄까봐 모두들 참 닮았어요)을 빼더라도 이 영화는 아주 양질의 배우들로 넘쳐흐릅니다. 킬러 그로서를 연기하는 댄 애크로이드부터 데비 역의 미니 드라이버, 불쌍한 오트만 박사 역의 알란 아킨까지 모두 멋들어지게 자기 역을 소화해내고 있는데다가, 다들 정도를 지켜서 앙상블을 깨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다들 능력있는 배우들이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같이 무표정한 영화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건 생각만큼 쉽지가 않죠.

5. 별점 주기

이 영화에도 '타란티노 풍'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할까요?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타란티노 자신도 불만이겠지만 요새 이 표현은 지나치게 남용되는 면이 있어서요. 폭력과 수다스런 유머를 뒤섞는 방식이 마치 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식이잖아요. 하여간 존 큐삭의 영화 만들기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언제나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의 무뚝뚝한 농담따먹기는 재미있고 꽤 영리하기도 하니까요.

자, 별점을 줄 시간이군요. 저희는 별 셋을 줍니다. 별 두 개 반을 주기엔 스크립트가 너무 영리하고 재기발랄하지만 별 셋 반을 줄 만큼 화끈한 깊이가 있는 영화는 아니니까요. (98/03/12)

D&P

기타등등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는 주인공 이름과 배경이 되는 소도시 이름을 엮은 것이지만, 존 부어맨 감독의 고전 [포인트 블랭크 Point Blank]의 제목을 개조한 말장난이기도 합니다. [포인트 블랭크]는, 보다 정확히 말해 그 영화의 원작인 웨스틀레이크의 소설은 [페이백]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