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창래

주연
고소영....나정주
유건....오태훈 (18세)
조안....나정주 (18세)
이중문....조하늬 (19세)
김정민....조하늬
이범수....오태훈
오미희....정주모
오달수....정주부
옥지영....선미
윤종신....윤종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과거사를 바꾸려는 주인공의 시도의 성공여부를 밝힌다는 거죠.)

정주와 정주

(1) [언니가 간다]는 [백 투 더 퓨처] + [페기 수 결혼하다]식 시간여행물입니다. 만족스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지금의 삶을 바꾸려 시도한다는 거죠.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정주는 18살 때 처음 만난 첫사랑을 바꾸면 지금의 구질구질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과거로 돌아갑니다.

이 영화에서 시간여행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마법의 웹사이트입니다. 하지만 좀 상황이 좀 애매모호해요. 영화는 이 웹사이트의 존재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꿈처럼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그냥 꿈이려니...하고 생각하려고 하니 정주와 같이 과거로 떨어진 친구 선미가 걸립니다.

논리는 중요하지 않아...라고 밀어붙이면 편하긴 하지만 그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설정의 빈약함은 종종 드라마에도 영향을 끼치거든요. 가장 노골적인 부분은 정주와 어머니가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감동적인' 부분인데, 설정이 너무 허약하고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작위적으로 보입니다. [인어공주]에서처럼 아주 설명을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뻔했어요. 그렇지 않다면 [백 투 더 퓨처]처럼 꼼꼼하게 설정을 깔아두거나요. [언니가 간다]의 설정은 그냥 '대충'입니다.

(2) 시간여행물에는 몇 가지 공식이 있습니다. 주로 시간여행을 통해 시공간이 꼬이는 방법에 따라 갈라지지요. 평행우주를 써서 막 나가거나, 역사 개변을 시도하거나, 절대로 바뀔 수 없는 단단한 시공간을 설정하거나...

[언니가 간다]의 우주는 폴 앤더슨이 [타임 패트롤]을 위해 만든 설정과 비슷합니다. 탄성이 있는 우주지요. 정주는 과거로 돌아가 구체적인 사건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개별 사건들을 바꾸어도 역사는 여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단지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나 장소, 시각이 바뀔뿐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설정들이 괴상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역사가 수렴된다고 해도 과거의 정주가 현재의 정주를 만난 사실은 바뀌지 않거든요. 하지만 시간 여행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과거의 정주와 대화를 주고 받는 현재의 정주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주가 체험한 과거는 사실은 평행 우주인 거고 과거의 정주가 현재의 정주와 같은 길을 걸어간 건 그냥 엄청 운이 없는 애여서일까요?

(3) 이 탄성있는 우주는 사실 하나의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아무리 과거를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거죠. 중요한 건 현실에 충실하며 미래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옳은 소리죠. 하지만 시간 여행을 다룬 이야기에서 이런 교훈을 들으면 좀 싱거워집니다. 과거를 후회해도 소용없는 건 우리에게 미래를 바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그런 힘을 주고 난 뒤에도 그런 소릴하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이 교훈이 먹히지 않는 또다른 이유는 정주의 선택이 아주 쉽기 때문입니다. 정주는 여전히 자기를 짝사랑하는 억만장자 동창 태훈을 만났습니다. 굳이 과거로 돌아가 그 동창을 첫사랑으로 만들 필요는 없어요. 지금부터 작업을 잘 걸면 되는 겁니다. 어차피 태훈을 첫사랑으로 만들어도 일이 안 풀리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죽을 거고, 공부도 못했으니 사회 생활도 잘 안 풀릴 거고, 태훈도 일 때문에 바쁠 테니 일찍 결혼하는 것도 무리겠죠. 결국 과거를 고친다고 해도 지금부터 잘하는 것과 별 다를 게 없습니다. 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아니군요.

(4) [언니가 간다]는 고소영의 첫 코미디라는군요. 왜?라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이 사람은 청순가련형 역을 맡기엔 너무 약아보이고, 진지한 드라마 주인공을 맡기엔 얇아보이며, 도회지 커리어우먼 역을 맡기엔 단단한 느낌이 없잖아요. 암만 봐도 이 정도의 로맨틱 코미디가 딱인데. 선입견이라는 게 괴상해요. 뻔히 눈에 보이는 걸 이런 식으로 가로 막다니.

조안의 경우는 신기할 정도로 적역이에요. 물론 코에 점 하나 찍는다고 고소영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고 있노라면 이 배우는 수상쩍을 정도로 '원본'과 비슷해집니다. 특히 몇몇 각도에서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에요. 이런 유사성과는 별도로, 조안은 고소영과 죽이 잘 맞으며 자기만의 생생한 캐릭터도 갖추고 있어요.

다른 배우들도 괜찮고 모두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명만 뽑으라면 전 어린 조하늬를 연기한 이중문을 언급하고 싶군요. 아, 느끼해요. [구타유발자들]의 이병준과 거의 쌍벽을 이룹니다. (06/12/20)

DJUNA

기타등등

1994년이 벌써 향수의 대상이 되었군요. 세월 참 빨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