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디에이터 Gladiator (2000) * * *

감독
리들리 스코트 Ridley Scott

주연
러셀 크로우....막시무스
Russell Crowe....Maximus
와퀸 피닉스....코모두스
Joaquin Phoenix....Commodus
코니 닐센....루실라
Connie Nielsen....Lucilla
올리버 리드....프록시모
Oliver Reed....Proximo
리처드 해리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Richard Harris....Marcus Aurelius
데릭 제이코비....그라쿠스
Derek Jacobi....Gracchus
지몬 한수....주바
Djimon Hounsou....Juba
데이빗 쇼필드....팔코
David Schofield....Falco
존 슈라프넬....가이우스
John Shrapnel....Gaius
토머스 아래나....퀸투스
Tomas Arana....Quintus
랠프 모엘러....하겐
Ralph Moeller....Hagen
스펜서 트리트 클락....루시우스
Spencer Treat Clark....Lucius
데이빗 헤밍즈...카시우스
David Hemmings....Cassius
토미 플래너건....키케로
Tommy Flanagan....Cicero

1.

안소니 만의 1964년도 작 [로마 제국의 멸망]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흥미로운 제목을 달고 있었습니다. 우선 영화는 우리가 멸망의 시기로 생각하는 로물로스 황제 시대를 다루고 있지 않았습니다. 멸망의 시작이라면서 그들이 다루었던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사망에서 코모두스의 짧은 집권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였습니다. 그렇게 독창적인 역사적인 관점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꽤 대담하고 야심 넘치는 제목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제목이 예언적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룬 이 영화는 그 우울한 제목으로 자신이 몸 담고 있었던 그리스-로마 사극이라는 장르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당시를 다룬 사극이 안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돈을 들인 세트와 의상의 홍수 속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이 총출동해 영국식 영어를 라틴어인 척하면서 가짜 셰익스피어 식 대사를 읊어대는 할리우드 대작 영화는 30년이 넘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그 동안 우린 그동안 무언가를 잃었던 걸까요? 그 끔찍하게 사치스럽기만 할 뿐 골이 텅텅 빈 영화들을 한 동안 안 보았다고 해서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잃기는 잃었습니다. 그런 영화들의 스펙타클을 창출해내기 위해 동원되었던 수많은 장인들이 직장을 잃었고 또 그들의 장인 정신도 새로운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한 동안 거의 맥이 끊기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닳고 닳은 천박한 장르라고 해도 그들은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예술정신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냥 몰아붙여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었던 거죠. [벤 허]나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영화들이 주는 거창한 스펙타클과 감동은 여전히 드문 것이지 않습니까?

2.

리들리 스코트의 [글래디에이터]는 바로 그 한동안 죽어 있던 장르를 되살린 영화입니다. 다룬 내용도 꽤 상징적이었지요. 한 장르의 종말을 장식했던 [로마 제국의 멸망]의 리메이크나 다름 없는 영화니까요. 진짜 리메이크는 아니지만 두 영화의 주인공 막시무스와 리비우스는 거의 동일인물이며, 아우렐리우스의 암살이나 코모두스의 죽음과 같은 픽션 섞인 해석도 거의 같습니다. [글래디에이터]는 [로마 제국의 멸망]이 다룬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 둘 사이에 연결 고리를 만들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긴 슬슬 되살릴 때도 되었지요.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로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효과들이 저예산으로 가능해졌고, 관객들은 늘 새로운 스펙타클을 갈망하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조금 늦은 감도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30여년간의 고고학적인 성과들은 그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로마 시대의 이미지에 상당한 수정을 가했습니다. 30년동안 할리우드의 어법도 많이 바뀌었고요. 아무리 사극이라고 해도 요새 배우들은 찰턴 헤스턴처럼 거창하고 연극적인 스타일로 연기하지는 않고, 영화 음악 작곡가들도 미클로스 로자식 음악을 작곡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뭔가 전혀 새로운 것을 보여줄 때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스코트는 정말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을까요?

그렇기는 합니다. 그가 만든 영화는 지금까지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로마 시대 사극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까요. 보다 디지탈적이고, 보다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보다 덜 가식적입니다. 영화는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사방에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습니다. [글래디에이터]가 보여주는 영상은 새롭습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그것은 발전인가요?

흠, 글쎄요... 전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전 영화를 보면서 계속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각본입니다. [글래디에이터]의 각본은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 나쁜 각본이야 여름 블록버스터에선 흘러넘치니, 그게 그렇게 대단한 뉴스는 아닙니다만, 로마 사극일 경우는 문제가 됩니다.

물론 나쁜 각본을 쓴 로마 사극도 많았습니다만, 그런 작품들에도 일종의 격은 있었습니다. 적어도 필립 조던이나 고어 비달이 만들어냈던 가짜 셰익스피어 대사들은 꽤 수준 높은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문학 전통에 익숙한 진짜 장인들의 것이었단 말이죠.

그러나 [글래디에이터]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대사는 서툴러서 남의 책을 흉내낸 것 같고 극적 구조는 헐렁합니다. 고전의 흉내를 내는 것도 이제는 사라진 테크닉일까요? 흠...

두번째 문제는 스코트의 현대식 영화 어법이 아직까지는 로마 사극에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의 21세기식 디지탈 이미지는 우리가 로마 사극에서 기대하는 그 복고적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지 못합니다. 훨씬 '사실적'으로 흘러가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식 해석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해요.

더 큰 문제는 그가 장대한 스케일을 창출해내는 데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도입부의 게르마니아 전투가 대표적입니다. 그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부분부분만 신경을 쓰다보니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어요. 영화는 전체를 조망하며 이야기의 스케일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 세부에 집중하다보니 부분부분이 설명 되지않는 장면도 많고요.

물론 요새 감독들까지도 와이드 스크린을 엄청난 무기로 내세웠던 당시 사람들처럼 자의식을 가득 담아 영화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스코트의 방식이 '대안'으로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그가 이 낡은 장르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 대부분은 당시엔 넘을 수 없었던 자극의 경계를 확장한 것일 뿐이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3.

러셀 크로우는 좋습니다. 각본을 생각하면 굉장히 좋은 거죠. 어떤 평론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말도 안되는 대사들을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드는 재능이 있습니다. 그건 순전히 배우의 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과 비교한다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에서 리비우스를 연기한 스티븐 보이드는 인상이 아주 약했거든요 (그렇다고 보이드가 나쁜 배우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영화에서 그랬다는 거죠.)

그에 비하면 호아킨 피닉스의 코모두스는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코모두스보다 덜 코모두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플러머와 다른 개성을 만들어내며 캐릭터를 차별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닉스의 코모두스는 매끈매끈하고 유쾌한 악당이었던 플러머의 코모두스와는 달리 상처입은 하이에나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는 우울한 악당입니다. 잘하면 꽤 흥미로운 인물이 될 수도 있었어요. 유감스럽게도 그는 각본의 비중이 작아서 플러머만큼 위협적인 인물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의 검투사 취미도 그려지지 않아서 마지막 결투 장면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코니 닐슨과 소피아 로렌을 비교하라고 한다면... 전 닐슨의 루실라 쪽이 더 좋습니다. 로렌보다 더 자연스럽게 배우들 사이에 어울리고, 캐릭터도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로렌의 캐릭터엔 '여자 친구'의 종속적 느낌이 강했지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의 리처드 해리스는 인상적입니다. 알렉 기네스와 비교해도 별로 꿀릴 게 없네요. 하지만 각본이 그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별로 믿음이 안 가는군요. 특히 '공화국 복귀' 운운은 억지가 심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영화 끝을 장식한 것도 별로 현명한 생각은 아니었어요. 기네스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쪽이 우리가 생각하는 철인 황제와 더 잘 맞았습니다.

그라쿠스 역의 데릭 제이코비는 낭비된 듯한 느낌입니다. 제이코비처럼 로마 사극에 잘 어울리는 배우가 이처럼 가볍게 쓰이다니 슬프군요. 가끔 그가 시대를 잘못 탔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금만 일찍 태어났어도 [나, 클라우디우스]는 할리우드 대작이 될 수도 있었는데.

4.

한스 짐머와 리사 게럿의 음악은 좀 갈팡질팡합니다. 미클로스 로자의 흉내를 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둥을 잡아 놓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몇몇 부분은 시대착오적으로 설명적이기도 합니다. 막시무스의 태생을 묘사하기 위해 스페인 음악인 척 할 필요까지는 없는 겁니다. 흠... 그러고 보니 루실라와 막시무스가 함께 있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은 로자 흉내를 낸 것도 같네요.

로저 이버트가 지적하며 불평했듯이, 화면은 이상하게 구질구질하더군요. 특수 효과를 감추기 위해서였을까요?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꾸미지 않아도 더 상세한 화면을 선사할 기술이 있지 않나요? 영화의 성격을 생각해도 그 구질구질함은 지나친 편입니다.

슬프게도 최근의 고고학적 지식은 그렇게 잘 반영된 편은 아닙니다. 콜로세움과 조각상은 채색이 더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부분의 새로운 터치는 재미있군요. 콜로세움의 지붕 위를 가린 천막 지붕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5.

누가 뭐라건 리들리 스코트는 [글래디에이터]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그의 차기작 [한니발]은 별로 믿음이 가지 않지만, 뭐 이 정도만 해도 된 거지요. 왜 그에게 엄청난 것을 기대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진짜 '작가'인 적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는 언제나 좋은 테크니션이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습니까? (00/06/20)

DJUNA


기타등등

올리버 리드의 명복을 빕니다.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