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안 Ang Lee

주연
랑시웅....주선생
Lung Sihung....Master Chef Chu
양귀매....가진
Yang Kuei-Mei....Jia-Jen
오천련....가천
Wu Chien-lien....Jia-Chien
왕유문....가령
Wang Yu-Wen....Jia-Ning
귀아뢰....양 아주머니
Gua Ah Lei....Madame Liang

1. 유머감각

저희가 이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세련된 유머 감각의 소유자이며 그 감각을 과장없이 영화 전체에 분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영화 감독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드물죠. 아마 그가 오랫동안 해외에서 작업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영화에 배인 미국 인디 영화의 냄새를 맡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유머 감각을 꼭 서구의 영향이라고 못박고 싶지는 않아요. 원래 그의 체질이었는데 서구에서 더 쉽게 발아될 수 있었겠지요. 아무리 세련된 유머 감각의 소유자라도 홍콩 영화계 같은 곳에서 코미디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잡치고 말겠지요.

2. 중국적?

글쎄요. 오히려 이 영화는 대만인들을 위한 영화라기보다는 외국인을 위한 영화가 아닐까요? 오토바이들이 우글거리는 차도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외부인의 시점입니다. 중국 음식 냄새가 가득 배인 가족적인 내용이 동양적이 아니냐고 어떤 분들은 말씀하겠지만,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독특한 면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지요.

한 문화의 스테레오 타입에 익숙한 사람들은 오히려 외국인들입니다. 언젠가 저희들 중 한 명이 어떤 미국인과 대화를 하다가 황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더군요. "하지만 당신은 동양사람 아닌가요? 동양 문명은 정신적이지요, 그렇지요?" 깨갱~~!

가족관계를 묘사했다고 해서 그것이 동양적이며 중국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간단하고 무성의합니다. 중국사람만 가족관계에 신경 쓰는 것도 아니지 않아요? 게다가 공동 각본가인 제임스 샤머스는 원래 유태인 가족을 모델로 해서 스크립트를 썼단 말입니다!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나오는 린다 리치맨을 그대로 닮은 양 아주머니가 그 잔재가 아닐런지요.) 물론 나중에 이안의 지적에 의해 여러 부분이 수정되긴 했지만요.

3. 각본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점수를 가장 많이 주고 싶은 부분은 바로 각본입니다. 짜임새있고 지나치지 않으며 매끄럽습니다. 그 다지 무게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재미있어요.

몇 가지 흥미있는 테크닉들이 보입니다. 하나는 심각하고 감상적이 될지도 모르는 부분들을 잽싸게 역전시키는 경쾌함입니다. 온 아저씨는 사람들이 걱정해주는 병원에서 푸념을 늘어놓으며 죽어가지 않고 퇴원을 축하하는 요리사들 사이에서 죽습니다. 아버지가 딸들 몰래 병원에 다녀오는 이유는 심장병 때문이 아니라 @%#@$!*& 때문입니다 (자세히 말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네요...^^;) 가진의 첫사랑은 진짜가 아니며, 그녀가 받은 연애편지도 진짜가 아닙니다. 영화가 심각해지고 전형적이 될 때마다 이 작은 역전들이 조금씩 튀어나오며 영화의 기수를 치켜 올리죠 (가끔가다 실수로 머리를 박긴 하지만 말입니다.)

리듬감도 주목할만 합니다. 저녁식사 때 터지는 세 번의 폭탄 선언이 어떤 식으로 짜여져 있는지 살펴 보세요. 동시에 전개되는 세 딸들의 로맨스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가도요.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리듬 때문에 마치 경쾌한 무용곡을 듣 는 기분이 들지요.

그밖에도 디테일이 깔끔한 뒷마무리들도 살펴보시기를. 산산의 도시락을 매개로 해서 깔리는 잔 복선, 가천이 가진의 환상을 알 아차린 바로 그날 밤,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는 병치도 좋지요.

4. 가천

[음.식.남.녀]의 등장인물들은 그다지 깊이있게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다. 대개 단어 한둘 정도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요. 가진-갑갑한 크리스찬, 양 아주머니-주책덩어리 왕 수다쟁이, 가령-발랄한 신세대, 주선생-고리타분한 아버지...

하지만 가천은 한마디로 말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녀는 신세대이기는 하지만 옛 세대의 유물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와 마찰이 가장 심한 사람이면서 가장 아버지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영화는 가천의 눈높이로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녀는 이안 감독의 성전환한 자화상이 아닐런지?

5. 주선생

주선생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가 일류 요리사라는 점, 그것도 일류 식당의 '사부님'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요리를 일급으로 아주 잘 만들기는 하지만 그의 요리는 집에서 먹기엔 너무나 거창하고 양도 많습니다. 그 때문에 주씨 집안 가족 멤버들을 함께 묶는 유일한 연결 고리인 그의 음식이 오히려 딸들에게는 짐이 됩니다.

그러는 중 그가 혀의 감각을 잃어간다는 설정은 매우 흥미롭지요. 그 무감각 때문에 금영의 요리를 '깨끗하게 비울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무감각이 가천의 요리에 의해 깨어난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음.식.남.녀]의 주제는 [결혼피로연]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결혼피로연]에서 이안이 옛 시대의 패배를 선언했다면, [음.식.남.녀.]의 경우 옛 세대가 신세대를 이해하고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유산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성숙한 문화라면 마땅히 그래야지요.

이런 말을 하다, 고리타분한 구시대와 뿌리끊긴 신세대로 뚝 잘려나간 우리나라의 꼴을 보면 슬프기 짝이 없군요. 이미 우리문화는 빈사상태에 빠진 모양입니다.

6. 음식

이안은 유행을 참 잘 타는 사람이군요. [결혼 피로연]이 게이 영화의 유행을 타고 성공하자 이번은 음식 영화의 흐름을 타고 잽싸게 [음.식.남.녀]를 만들어요? 풋!

하지만,중국 음식에 대한 감독의 흥미가 즉석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감독 자신도 요리가 취미라고 하고, [결혼 피로연]에도 그 흔적이 보였지요. 특별히 유행을 타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7. 커리어 우먼

이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니 짧게 쓰겠습니다. 바로 가천의 직장생활의 묘사 때문인데, 솔직히 말해 너무 이상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나요? 하긴 그런 사람도 있겠고 가천의 캐릭터에 어울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너무 술술 잘 넘어가는 회사의 분위기는 리얼리티를 떨어뜨리기만 할 뿐입니다. 오히려 집까지 잔업을 끌고와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일하는 금영의 모습이 더 리얼하고 진짜 같습니다.

8. 배우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주선생을 연기하는 랑시웅입니다. 이 배우는 [결혼피로연]에서도 아주 좋았지만 이 영화 속에서도 훌륭합니다. 이안 덕분에 좋은 배우를 하나 알게 되었군요. 그의 다른 영화도 보고 싶습니다.

가천 역의 오천련도 좋았습니다. 저희가 이 사람을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천장지구]의 소위 '청초한(윽....)'이미지에 속았었나 봐요.

나머지 배우들은 좋았지만 대부분 그다지 미묘한 캐릭터가 아니었고 별다른 연기력도 필요하지 않는 역이었으며 '스타성'이 필요한 역도 아니어서 그다지 튀지는 않았어요. 다만 대만판 린다 리치맨인 귀아뢰는 스테리오 타입이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9. 그리고...

[음.식.남.녀]는 일단 재미있고, 다 본 뒤에도 허망한 느낌을 주지않는 알찬 영화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안 특유의 감상주의는 완전히 청소되지도 않았고 깊이 있는 묘사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대중적이면서도 알차며 세련된 코미디를 만드는 감독이 중국어권에도 있다니 기쁘군요.

게다가 이안은 아직 크고 있는 중이니 다음 작품도 기대할 만합니다. 그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 생각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 있어요. 흥미롭군요. 영국 소설이지만 상당히 이안 풍인 소재입니다. (94/11/04)

D&P

기타등등

이안의 '오스틴 영화'는 [센스 앤 센서빌리티]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