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안 Ang Lee

주연
주윤발....이무백 (리무바이)
Chow Yun-Fat....Li Mu Bai
양자경....유수련 (수련)
Michelle Yeoh....Yu Shu Lien
장자이....옥교룡 (용)
Zhang Ziyi....Jen
장진....나소호 (호)
Chang Chen....Lo
정패패....벽안호리 (파란 여우)
Cheng Pei-pei....Jade Fox
랑웅....철패륵 (패이러)
Lung Sihung....Sir Te

1.

[와호장룡]이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린 수많은 언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일단 이 영화의 각본 자체가 중국어로 쓰여진 작품을 중국어로 각색하고 그걸 다시 영어로 옮겼다가 다시 중국어로 옮긴 것이지요. 게다가 이 작품은 사실 소니 콜롬비아 사가 제작한 미국 영화라, 보도 자료는 모두 영어에서 번역해온 것입니다. 물론 자막도 영어 번역을 또다시 번역한 것이고요. 게다가 두 주연 배우인 주윤발과 양자경은 북경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말이 같은 중국인이지, 주인공들의 반 이상은 외국어로 연기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요.

하여간 시작부터 어지럽습니다. 보도 자료나 브로셔들을 보세요. 심지어 표기법도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周潤發이나 楊紫瓊은 그냥 우리식 발음을 따라 '주윤발'이나 '양자경'으로 표기되고 있지만 章子怡는 엉뚱하게 '장지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요. '장쯔이'도 아니고 '장자이'도 아닌 장지이입니다. 영어 자료를 그대로 옮겨쓰다보니 발생한 사고지요. 캐릭터 이름은 어떤가요? 다른 사람들은 다 '수련'이나 '용'인데, 왜 주윤발 캐릭터 이름만 엉뚱하게 '리무바이'가 되어야 하는 겁니까?

적어도 표기법은 통일해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원래 발음 그대로를 쓰는 것이겠지요. 周潤發은 저우룬파, 楊紫瓊은 양즈츙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아무리 원래 발음을 적는 게 옳다고 해도, 이런 식의 표기로는 도대체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 같지 않군요. 그냥 한국식 발음을 쓰는 게 이 경우에는 옳은 듯해요. 하지만 한문 정보를 얻는 게 쉽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도대체 리무바이를 한자로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신경써서 자막을 봐둘 걸.

(이 글을 쓴 뒤에야 정보를 얻었습니다. 리무바이는 李慕白이라더군 요. LAZY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무백'이 되지요?)

2.

[와호장룡]은 어떻게 보면 유행에서 심각할 정도로 떨어져 있는 작품입니다. 무협 영화의 원산지였던 홍콩에서는 이런 식의 무협 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촌스러운 컴퓨터 그래픽을 덧붙인 소위 테크노 무협이란 것들이 드문드문 나오긴 하지만, 정통적인 무협 영화는 오래 전에 유행이 지났지요. 물론 무협 영화 장르에서 이런 몰락은 처음이 아닙니다. 무협 영화는 부침이 잦은 장르지요. [소오강호]로 시작된 신무협의 유행도 생각만큼 길지 않았습니다.

캐스팅 역시 꽤 당황스럽습니다. 물론 주윤발과 양자경은 홍콩 영화계를 대표하는 대스타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협 영화 단골 배우들은 아니죠. 양자경은 신체 훈련이 잘 된 배우이고 액션 연기에 능숙하기라도 하지만, 주윤발은 이런 종류의 연기엔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한 무협 연기는 미니 시리즈 [소오강호]가 전부였는데, 그것도 당시 한창 뜨던 그의 명성을 잠시 이용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영화가 나왔을까요? 간단합니다. 이 작품은 본토박이 중국 영화가 아닙니다. 일련의 중국 열풍에 자극을 받은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국제적인 시장을 노리고 만든 미국 영화지요. 한물간 장르가 이처럼 대담하게 나올 수 있는 것도, 아시아권 밖의 일반 관객들이 이런 종류의 영화를 접한 경험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하면 자연스럽습니다. 무협 스타들 중에는 국제적 명성을 누리는 배우가 별로 많지 않으니 주윤발이나 양자경의 캐스팅도 자연스럽고요.

재미있게도 반쯤은 무지의 결과이고 반쯤은 기회주의의 산물인 이 계획이 결과적으로는 작품의 질을 상승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말만 중국인이지 이제 거의 국외자나 다름 없는 이안은 억지로 자신의 스타일을 홍콩식 무협 영화의 관습에 끼워맞출 필요가 없었고, 그 때문에 영화는 눈치보는 일 없이 솔직하고 품위있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주윤발과 양자경은 자신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얻었습니다. 미국 자본과 기술이 결합한 결과, 영화가 보여주는 화면은 훨씬 부티가 나고 아름답습니다. [와호장룡]은 아주 전통적이고 고전적이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선한 영화입니다.

3.

[와호장룡]의 스토리를 어떻게 요약하면 될까요? 이 영화에는 청명검이라는 보검이 등장합니다. 청명검과 함께 칼의 옛 주인인 이무백이라는 무당파 고수와 그가 말없이 사랑하는 옛 친구의 약혼녀인 수련이 나오고요. 보검이 도난당하고 다시 나타나고 하는 동안 그들은 용이라는 고관의 딸과 미묘한 관계에 얽히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용의 산적 남자 친구인 호와 이무백의 스승을 죽인 원수인 파란 여우라는 도둑이 중간중간에 끼어들고요.

[와호장룡]의 스토리를 요약 정리하는 것은 보기만큼 실속있는 일이 아닙니다. 스토리는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 영화의 드라마는 기묘할 정도로 모양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 청명검이 스토리를 이끌어가지만 정작 이 칼에 신경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영화가 시작도 되기 전에 찬밥 신세지요. 고비 사막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공간을 누비면서도 정작 전개되는 이야기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고, 몇몇 인물들과 액션은 중간에 툭 튀어나오거나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이안은 어이 없을 정도로 여유있는 태도로 20분이 넘어가는 플래시백을 중간에 삽입하고, 가장 거창해야 할 법한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무성의하게 잘라버리기도 합니다.

그 결과 영화는 구름처럼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모양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그런 불분명한 모양이 영화에 독특한 매력을 안겨줍니다. [트리스트럼 섄디]처럼요. 그 때문에 영화가 더 커보이고 더 시적으로 보이기도 해요. 스토리가 완벽하게 짜여져 있었다면 이 작품은 훨씬 작은 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영화가 모호한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내용이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와호장룡]은 자기가 가는 길을 알고 있고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와호장룡]은 캐릭터에 의해 움직이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청명검을 둘러싼 액션과 음모가 아니라, 두 수줍은 중년 연인들의 말없는 애정과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틴에이저 소녀의 반항, 이들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싹트는 감정의 변화입니다. 청명검은 그들의 내적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네, 완벽한 맥거핀이지요.

보통 단순무식하기 마련인 이 장르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일정한 깊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영화에는 완벽한 악당도 없고 완벽한 선인도 없습니다. 심지어 무시무시한 악당이라고 해야 할 법한 파란 여우도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엔 오히려 가장 동정가는 사람이에요. 무당파의 남녀차별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르려고 그토록 애를 썼건만 유일하게 믿은 제자한테서 그처럼 철저한 배반을 당하다니요.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이무백이나 수련의 말없는 사랑과 조용한 좌절도 아름답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그들이 아닌 용입니다. 무협 영화에 이처럼 풍요로운 성격의 주인공이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요? 용과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내려면 웬만한 무협 영화 열 편은 긁어와야 할 겁니다. 어떤 때는 신분을 넘어선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연인이고, 어떤 때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틴에이저이고, 어떤 때는 단순히 호강에 겨운 성미 고약한 부잣집 딸이고, 어떤 때는 이중 생활을 하는 범죄자이고, 어떤 때는 폭력적인 다혈질 깡패이고, 어떤 때는 윗 사람과 스승의 자리를 넘보는 음흉한 제자이고, 어떤 때는 제도에 반항하는 중국식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이 범상치 않은 인물은 선과 악, 혐오와 매혹, 여인과 소녀의 경계를 드나들며 관객들에게 뜻밖의 성찬을 선사합니다.

정신이 번쩍 도는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용의 캐릭터가 일관성을 잃지 않은 건, 이안이 이런 미묘한 나이를 사는 여성의 심리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밖에 할 수 없군요. 경험 덕택일 겁니다. 이안은 [와호장룡]이 무협 버전 [센스 앤 센서빌리티]라고 말하곤 하는데, 아주 농담은 아닙니다. 정말 이 영화는 [센스 앤 센서빌리티]와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죠. [와호장룡]는 페미니즘 메시지를 깔고 무협을 배경으로 삼은 틴에이저 반항기입니다. 여성위주이며 투쟁보다는 대화 중심인 영화지요.

4.

[와호장룡]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건 역시 원화평이 가담한 수많은 액션 장면들입니다. 영화가 시작된 지 한 20분 정도 기다리면 청명검 도둑과 수련의 현란한 와이어 액션이 펼쳐집니다. 물론 우린 줄에 매달려 날아다니는 무사들을 예전에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기와 지붕들의 끝도 없는 긴 파도를 넘나들며 날아다니는 이들의 우아한 모습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일단 돈이 들어간 결과가 아닌가 싶어요. 지금까지 북경시의 밤풍경을 이처럼 광대하게 잡아낸 무협 영화는 없으니까요.

물론 그 뿐만은 아닙니다. [와호장룡]은 일반 무협 영화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액션 장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적대적 두 사람의 투쟁으로서의 결투는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대화이고 설득이며 애정의 표현입니다. 오페라 주인공들이 노래로 하는 것을 이들은 몸으로 하는 거죠. 각 결투 장면들은 오페라의 이중창처럼 주제와 스타일, 고유의 선율을 지정받고 있습니다. 무척 여성적이기도 하고 무협 버전 [센스 앤 센서빌리티]라는 별명에 잘 맞기도 합니다.

과연 제가 원화평의 와이어 액션 스타일에 완전히 동조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와호장룡]은 지나치게 중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 와이어 액션이 초현실적인 비상과 중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와호장룡]에서 주인공들은 거의 수퍼맨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이 비현실성은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서극의 신무협 영화들은 이런 균형에 훨씬 가까이 다가간 영화들이었지요.

그러나 액션의 서정성과 창의성, 리듬감, 종종 적절하게 삽입되는 유머 감각은 이런 불만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영화는 정신없이 빠른 액션으로 무작정 관객들을 두들겨패는 대신, 적절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동작을 어휘로 삼은 다채로운 시들을 만들어냅니다. [와호장룡]은 노래할 줄 아는 드문 액션 영화입니다.

5.

주윤발의 역은 원래 이연걸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답니다. 장르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더 적절한 캐스팅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주윤발에게 돌아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연걸이었다면 분명 주윤발보다 더 잘 날아다녔겠지만, 주윤발처럼 중년 연인의 조용한 감정을 잘 살리지는 못했을 겁니다. 폼도 참 잘 잡았어요. 필요 이상의 남성성을 남발하는 것도 아니면서도 충분히 '중후'해서 똥폼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미안할 정도입니다.

양자경 역시 나이를 그냥 먹은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두 배우의 호흡도 잘 맞아서 두 캐릭터 사이에서 조용히 끓어오르는 오래된 연정 역시 근사하게 살아납니다. 양자경에게는 주윤발이 가지고 있지 못한 무협 액션 배우로서의 장점도 있고요.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배우는 용을 연기한 신인 장자이입니다. 캐릭터가 화끈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기본기가 있는 배우이고 연기도 참 잘 했으며 캐스팅도 잘 되어 있습니다. 특히 액션 장면에서 장자이는 양자경보다 더 인상이 강합니다. 작고 연약한 소녀다운 인상이 무협 액션의 춤과 같은 우아함을 강화하는 동시에 액션의 폭력성과 멋진 대조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죠. 늘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주윤발이나 양자경과는 달리, 이 배우는 액션 장면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며 새로운 어휘를 선보입니다. 장난감 빼앗긴 아이처럼 툭탁툭탁 싸우기도 하고, 대나무 숲을 우아하게 날아다니기도 하다가, 수십 명의 동네 건달들과 여관을 박살내놓는 동안 시라노 드 베르주락도 창백해질만큼 후련한 솜씨로 시를 읊어대죠. 여관 장면에서 용이 맵시있게 시를 마무리 한 뒤에는 정말 박수까지 치고 싶어집니다.

호 역의 장진이 하는 일은 주로 무법자 이미지로 로맨틱한 분위기를 잡는 것인데, 역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잘하긴 했습니다. 참, 왕년의 액션 스타 정패패 아줌마가 파란 여우로 나와 본때를 보여주고, 이안 영화의 단골 손님인 랑시웅 할아버지가 초반에 잠시 나온답니다.

인간 배우들만큼 중요한 배역을 맡고 있는 것은 청명검입니다. 종종 인간 캐릭터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기능적 위치를 생각하면, 이 칼의 존재감은 놀라울 정도로 강합니다. 매번 청명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금속성의 강렬한 영화적 라이트모티브가 극장 안에 울려퍼집니다. 보고나면 용이 왜 그 칼에 그렇게 매달리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50년대 미국 틴에이저에게 자동차가 그랬던 것처럼, 청명검은 용에게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었던 거죠.

6.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 문제입니다. 위에 늘어놓은 배우평은 모두 언어 문제를 밀어놓고 쓴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장자이를 제외하면 북경어가 모국어인 주연 배우는 없습니다. 장진은 대만 출신이고 주윤발은 홍콩 출신이며 양자경은 말레이지아에서 왔죠. 그 때문에 북경어에 능숙한 관객들은 종종 주연 배우들의 미숙한 북경어 대사 처리에 불평을 늘어놓곤 했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이 영화는 외국어를 쓰는 관객들에게 더 어필하는 영화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짜증이 나는 것은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올 때 나오는 코코 리의 주제가입니다. 너무 뻔하고 지루해서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는 음악도 좋았거든요. 요요 마가 얼후를 위장하고 연주하는 은은한 첼로 음악은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넓디 넓은 공간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곳은 고비 사막이 아니라 북경 시내입니다. 매트 페인팅과 컴퓨터 그래픽의 결합으로 만들어낸 것 같은데, 전에도 말했지만 홍콩 영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옛 북경 시내를 재현한 적이 없었지요. 참 새로웠습니다.

[와호장룡]이 만들어내는 하이프의 일부는 무협 장르에 익숙하지 못한 서구 관객의 놀라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장르에 익숙한 아시아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제공해주는 신선한 정통주의 역시 강렬합니다. 오래간만에 묵직한 건더기가 남는 좋은 무협 영화를 보았어요. (00/08/10)

DJUNA

기타등등

원작이 시리즈 소설이어서, 이 영화의 전편과 후편에 대한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