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로버트 리콕 Robert Leacock

주연
크리스티 털링턴
Christy Turlington
나오미 캠벨
Naomi Campbell
린다 에반젤리스타
Linda Evangelista
케이트 모스
Kate Moss
아이작 미즈라히
Isaac Mizrahi
칼라 브루니
Carla Bruni
크리스찬 슬레이터
Christian Slater

1.

크리스티 털링턴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제가 알기로는)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텔레비전 용으로 만들어진 [크리스티 털링턴과 백 스테이지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극장용인 [캣워크]지요. 오늘 [캣워크]를 보았는데요...

2.

일단 이 영화가 감독인 로버트 리콕이나 주인공인 크리스티 털링턴 두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해야 공평할 것 같습니다. 리콕은 막판에 제작자한테 최종 편집권을 잃고 '공동 감독'으로 쫓겨났고 털링턴 자신도 감독의 항의에 동의해 시사회에도 가지 않았지요(그 사람의 평소 행동을 고려해보면 엄청나게 강한 의사표현이었다는 걸 아실 겁니다.) 리콕이 어떤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그 사람이 만들려고 했던 영화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하고 넘어가죠.

3.

[캣워크]의 가장 큰 단점은 도대체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같은 패션 세계를 다룬 더글러스 키브의 [언집트]의 경우, 여기엔 분명히 콜렉션을 성공시키려는 한 디자이너의 노력과 창작 욕구와 같은 중심 주제가 있으며 이 모든 요소들은 콜렉션이라는 정점에서 터져 나옵니다. 하지만 [캣워크]에서 카메라는 콜렉션을 따라 움직이는 털링턴을 끊임없이 쫓아다닐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대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죠.

패션 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겁니다. 마이클 그로스의 베스트셀러처럼 옐로 저널리즘 냄새가 물씬나게 공격적이고 천박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역시 털링턴이 주인공이었던 다른 다큐멘터리인 [크리스티 털링턴과 백 스테이지에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실적이 되어서 그들을 넘쳐나는 일에 시달리는 커리어 우먼으로 묘사하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그들을 안내자로 삼아서 패션 세계를 탐험해가는 방법도 있겠지요. 아니면 그들을 사람이 아닌 그냥 이미지로 여기고 그 영향력을 탐구하는 방법도 있어요.

어떤 걸 찍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만들 건 간에, 영화는 개념을 하나 잡고 있어야 하며 그걸 일관성있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냥 따라가기만 합니다. 게다가 가끔 무슨 영화를 찍는지 자신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털링턴은 콜렉션에 참가하고 파티에도 가끔 나가고 쇼핑도 가끔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사람의 진짜 사생활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모델들이 주연이 아닌 [언집트]에서도 충분히 묘사되었던 디자이너와 모델들과의 상관관계도 이 영화에서는 조금도 드러나 있지 않지요. 이 영화는 그냥 백 스테이지와 스테이지에서 일어나는 몇몇 상황의 조합일 뿐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백스테이지...]에서처럼 관객들을 털링턴에게 감정이입시키는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4.

이 영화가 무가치한 화면들로만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흥미있는 부분들은 콜렉션들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파리에서, 카메라는 크리스티 털링턴에게 막 사인을 받은 한 열정적인 팬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어마어마한 털링턴의 사진 콜렉션을 제작진들에게 보여줍니다. 전혀 글래머러스한 장면은 아니지만 여기서 우리는 패션계의 이미지가 특정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의 직접적인 일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클레멘테가 크리스티의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도 좋은데, 대사 한마디 없는 장면이지만,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동안 화가와 모델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느낌이 무척 매력적으로 표현되어 있거든요. 이 영화가 원래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적어도 콜렉션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패션계나 모델계의 가십들과 사람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털링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케이트 모스나 땡전 한 푼도 못버는 갈리아노를 동정하는 (이 영화는 갈리아노가 디오르에 가기 전에 찍은 영화입니다) 앙드레 레옹 탈리, 농담 따먹기를 해대는 미즈라히 같은 걸 보며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잊더라도 크리스티 털링턴 팬이라면 이 영화가 흥미진진할 겁니다. 털링턴이 아주 '많이 나오니까요.' 이 사람이 안 나와서 요새 런웨이가 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볼만 하겠군요. (97/08/01)

DJUNA

기타등등

이제 '수퍼 모델'의 시대는 끝난 것 같지요? 요새 좋은 모델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80년대와 90년대 초에 있었던 호사스러움은 요즘 모델계에 없습니다. 거품이 빠진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