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대승

주연
이병헌....서인우
이은주....인태희
여현수....임현빈
홍수현....어혜주
전미선....인우처
김정학....차기석
이지용....곽윤정
장석원....조재일
김준호....신영호
남궁민....김성철
방진의....김현경

(스포일러가 잔뜩 있으니 각오하시고...)

1983년, 국문과 학생 인우는 어느날 밤 빗길에서 만난 조소과의 태희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곧 애인 사이가 되지만 인우가 군입대를 하는 날, 배웅을 나오기로 한 태희는 연락없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죠.

2000년, 인우는 이제 아내와 딸이 있는 평범한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인우는 그가 담임으로 있는 2학년 5반 학생인 임현빈에서 이상하게 친숙한 느낌을 발견합니다...

[번지 점프를 하다]는 운명론적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운명론적 사랑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윤회입니다. 죽지 않는 불멸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들이 끝도 없이 써먹는 도구죠. 태희가 인우를 배웅나오지 못한 건 그녀가 교통사고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현빈은 환생한 태희고요.

이 영화가 윤회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차별되는 점이 있다면 태희가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서 묘하게 동성애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되지요.

우선 맘에 드는 점부터 열거하겠습니다. 일단 두 주연 배우인 이병헌과 이은주는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병헌을 아주 좋아한 적은 없지만 이 배우가 알맹이 찬 좋은 연기자로 성장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이은주는 그에 비해 다소 거칠고 평범해보이기는 하지만 은근히 사람 맘을 끄는 구석이 있고요. 둘 다 인우와 태희라는 캐릭터를 믿음직스럽고 흥미롭게 끌고갑니다.

전 도입부인 1983년 장면도 좋았습니다. 인우와 태희의 로맨스는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이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작은 디테일들은 훌륭했습니다. 인우의 썰렁한 농담에 무표정하게 반응했다가 조금씩 웃음을 터트리는 태희의 모습과 같은 것들은 사실적이었고 그만큼이나 매력적이었어요.

하지만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때까지 제가 품었던 호감은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대충 두 가지 끔찍한 이유가 있었죠.

먼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로맨티시즘입니다. 전 극단으로 치닫는 로맨스 영화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처럼 극단적인 로맨스만 다루는 영화는 경계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것을 하나 잊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로맨스를 아름답고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로맨스 자체가 아닙니다. 로맨스가 그만큼이나 절실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충돌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과 대립하지 않는 로맨스는 아주 잘 만들지 않으면 공허해져 버립니다.

얼핏 보기에 [번지 점프를 하다]에는 현실과의 대립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인우의 사랑은 편견 섞인 타인의 시선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충분하지 않냐고요? 아뇨,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런 현실과의 대립을 통한 내면의 갈등이니까요.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인우는 그저 외부의 시선과 현빈의 존재에 기계적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동성애자일까봐 잠시 고민하지만, 현빈이 환생한 태희라는 걸 알게 되자 그 고민도 곧 기계적인 반응으로 퇴화하고 맙니다. 엄연히 지켜야 할 딸과 아내가 있으면서도 그는 당연하다는 듯 현빈과의 동반 자살로 삶을 끝맺습니다. 현빈은 또 어떻고요? 기억이 잘 나지도 않는 전생이 과연 그가 지금 살고 있는 현생보다 중요합니까? 그만큼 전생의 삶이 중요했나요?

그리고 이런 질문이 계속 관객의 머리 속을 도는 한 이 영화의 결말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형식적인 로맨티시즘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진지하지 못한 태도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동성애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우선 이런 질문을 해보죠.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보여지는 사랑은 동성애일까요?

아뇨, 인우와 현빈은 모두 이성애자입니다. 그리고 인우가 사랑하는 것은 현빈이라는 남자가 아니라 현빈이라는 남자의 몸 속에 숨어 있는 태희라는 여자에 대한 자신의 기억입니다.

이런 설정은 두 가지 면에서 불쾌합니다. 첫째로, 이건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중년 남자가 아무 상관도 없는 미성년자에게 가하는 정신적 폭력입니다. 둘째로, 이런 식의 설정은 동성애자들에게 친근한 척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배반하고 있습니다. 어떤 쪽으로 보더라도 지극히 위선적이에요.

특히 후자는 거의 고정된 이성애자들의 판타지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아마 수많은 이성애자 관객들은 이런 식으로 동성애자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며 자기 만족을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가짜 동성애자 커플을 통해 동성애자들을 카르마의 실수 쯤으로 밀어붙이는 영화의 입장은 동성애자들을 자연의 실수라고 우기는 악명 높은 닥터 로라의 입장보다 특별히 나을 것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인우의 대사를 한 번 들어보세요. '내가 여자로 태어나면 어쩌지?' 뭐예요, 이번에도 남녀짝이 맞지 않으면 또 투신자살 하겠단 말입니까? 그렇게 삶이 가볍습니까?

[번지 점프를 하다]는 수많은 정치적인 실수들로 부글거리는 영화입니다. 아마 이들이 조금이라도 자기가 다루는 대상에 대해 연구하고 생각해봤다면,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봤다면 이처럼 단순무식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호감가는 전반부를 생각하면 정말 아쉽군요. 기성품 로맨티시즘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01/02/13)

DJUNA

기타등등

허리우드 극장에서는 엔드 크레딧을 자르더군요. 나중에 게시판 글을 읽어보니 이 극장에서는 전에도 그랬던 모양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극장으로 가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