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존 슐레진저 John Schlesinger

주연
톰 코트니....빌리 피셔
Tom Courtenay....Billy Fisher
윌프레드 피클스....제프리 피셔
Wilfred Pickles....Geoffrey Fisher
모나 워시본....앨리스 피셔
Mona Washbourne....Alice Fisher
에셀 그리피스....플로렌스
Ethel Griffies....Florence
핀리 커리....덕스버리
Finlay Currie....Duxbury
그웬덜린 와츠....리타
Gwendolyn Watts....Rita
헬렌 프레이저....바바라
Helen Fraser....Barbara
줄리 크리스티....리즈
Julie Christie....Liz
레너드 로시터....샤드락
Leonard Rossiter....Shadrack

빌리

[빌리 라이어]의 주인공 빌리 피셔는 이중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실생활에서는 동네 장의사에서 일하는 게으른 청년이지만, 공상 속에서는 암브로시아라는 피투성이 국가의 리더지요. 빌리는 꽤 똑똑한 친구지만 게으르고 결단력이 부족해서 그의 창의성은 늘 공상과 거짓말로만 끝나고 맙니다. 그나마 그의 창의성을 현실 세계와 연결시킬 수 있는 소설 집필과 같은 계획도 제대로 현실화되지 못하고요. 소설 대신 그가 세상에 퍼붓는 거짓말들은 그에게 '빌리 라이어'라는 별명을 달아줍니다.

영화는 그래도 꽤 희망적인 분위기에서 시작합니다. 빌리의 스크립트가 코미디언 대니 분의 마음에 들었다니 잘만하면 그는 지긋지긋한 북부 영국의 작은 동네를 떠나 런던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오랫만에 고향에 돌아온 자유로운 영혼 리즈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마도 그의 모자란 결단력을 채워줄 수도 있을 거고요. 그가 친구와 함께 쓴 유행가는 첫 공연을 할 준비를 마치고 있습니다. 빌리 피셔에게 이처럼 기회가 가득한 날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월터 미티식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가운데, 빌리의 인생은 계속 꼬여만 갑니다. 그가 수없이 뿌려댔던 거짓말들은 하나씩 폭로되기 시작하고 자기 자신도 반쯤 속은 공상 속에서 진행된 계획은 현실의 차가운 벽에 부딪혀 좌절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영감을 주는 뮤즈가 나타났다고 해도 그의 나약한 심성은 쉽게 극복될 수 없고요.

[월터 미티의 비밀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빌리 라이어의 이야기도 희극의 형식을 빌린 비극입니다. 환상만으로는 희극이 될 수 있습니다. 기죽은 젊은이의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을 그린다면 건조한 일상의 묘사는 될 수 있어도 비극은 되지 않겠죠. 하지만 환상과 현실이 충돌하며 서로를 밀어낼 때 주인공 빌리 피셔의 작은 삶은 정말로 비극적이 됩니다.

[빌리 라이어]가 가진 드라마의 힘을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당시 사회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의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들과 겪은 전쟁은 요새 젊은이들이 겪는 것보다 훨씬 격렬했습니다. 우리가 머리쓰지 않고 생각하는 고루한 부모와 반항적인 아이들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싹 튼 것도 그 때였으니까요. 그런 아이들이 빌리 또래의 아이들을 낳은 지금 세대간의 충돌은 이전과 같은 의미를 잃어버렸지만, 당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빌리의 공상은 어떻게 보면 부모 세대가 강요하는 질서에 대한 초라한 도전이었습니다. 알아요. 빌리는 정말 의미있는 반항을 할만한 사람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빌리 라이어]는 선언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런 젊은이들을 미화없이 묘사한 작품이었죠. 반백수 공상가 빌리는 어떻게보면 현실에서 별다른 희망을 찾지 못한 영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정확한 묘사일 수도 있었습니다.

자꾸 영화를 우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빌리 라이어]는 음침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무척 즐거운 영화입니다. 빌리 피셔는 친구 삼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아도 멀리서 구경하기는 참 재미있는 친구입니다. 빌리는 사기꾼 토마처럼 타고난 협잡꾼입니다. 못된 동기로 사람을 속이는 소악당이 아니라 그냥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을 즐기는 타입이죠. 빌리가 진짜 악당이라면 이처럼 많은 곤경과 마주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의 공상과 거짓말은 사소한 이익을 넘어섭니다. 제대로 된 소설 한 편 쓰지 않았고 썼다고 해도 대단한 작품이 나올리도 없겠지만, 그는 예술가입니다.

톰 코트니의 절묘한 연기 역시 빌리 피셔라는 캐릭터를 환상적으로 살려주는 원동력입니다. 이 배우는 쉽게 건조함과 과장의 극단에 떨어지기 쉬운데, 몽상가 젊은이라는 캐릭터가 이 둘을 근사하게 보완해주는 듯 합니다. 아마 코트니가 평생 동안 보여준 최고의 연기일 거예요.

많은 영화팬들은 이 영화를 줄리 크리스티의 출세작으로 기억할 겁니다. 크리스티의 배역은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핸드백을 휘두르며 거리를 가로지르는 크리스티의 모습은 당시엔 거의 새로운 여성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답니다.

존 슐레진저의 연출은 당시 한참 무르익어가던 젊은 영국 감독들의 에너지를 담뿍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에 나왔던 동료들의 영화들처럼 차가운 현실만 건조하게 토해내는 것도 아니고요. [빌리 라이어]의 역동적인 화면 속에는 대중 예술가 슐레진저의 미래 역시 보입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빌리 라이어]는 당시 관객들에겐 직접적으로 다가왔을 어떤 터치를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빌리의 이야기가 관객들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젊은이들의 고민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01/10/19)

DJUNA

기타등등

[빌리 라이어]는 키스 워터하우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희곡을 또다시 옮긴 것입니다. 이 작품은 영화 개봉 이후에도 상당한 인기를 끌어서 나중엔 텔레비전 시리즈와 뮤지컬까지 만들어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