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존 부어맨 John Boorman

주연
패트리샤 아퀘트....로라 보먼
Patricia Arquette....Laura Bowman
우 아웅코....우 아웅코
U Aung Ko....U Aung Ko
프랜시스 맥도먼드....앤디
Frances McDormand....Andy
스폴딩 그레이....제레미 와트
Spalding Gray....Jeremy Watt
아델 러츠....아웅산 수지
Adelle Lutz....Aung San Suu Kyi

1.

부어맨의 영화들 중 최고 걸작을 하나 뽑으라고 하면 우린 [엑스칼리버]나 [딜리버런스] 대신 [희망과 영광]을 꼽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이죠. 하지만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닌 게, 부어맨의 영화는 낯선 배경 속에서 뭔가 거창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는 종종 우스워지거든요. [에머럴드 포레스트]나 [엑소시스트 2]같은 영화를 보면 어이가 없어요.

[희망과 영광]은 많은 부어맨 영화들과는 달리 무척이나 밝고 통통 튀는 유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양반도 나이를 먹어서 어느 정도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눈을 얻었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웬걸, [비욘드 랭군]이 나왔네요.

2.

이런 종류의 영화를 대하는 우리의 입장은 어느 정도 냉소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 보기 전에 가지고 들어왔던 선입견이 대충 또 맞기 마련입니다.

[비욘드 랭군]은 이런 종류 영화들의 설계도에 너무나 충실합니다. 갑작스럽게 폭력적인 미개국에 떨어진 주인공이 나오고 그 주인공은 그 나라의 정치적인 혼란 사태에 휘말립니다. 여기에는 동양적인 지혜를 가진 이 나라 국민이 하나 끼어들어서 주인공을 돕고요. 뻔하지요?

그러나, 꼭 그렇게 냉소적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어차피 부어맨이 미얀마 사람들의 시점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적당한 서양인 캐릭터를 하나 던져놓고 구경꾼의 시점에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요.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미얀마 사태에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림없는 소리죠. 우리는 미얀마의 군부가 나쁜 애들이라는 걸 압니다. 로라를 강간하려고 했고 불쌍한 만한을 괜히 총으로 쏴 죽였고 아웅코를 때려눕혔으니까요. 그러나 그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타잔 영화와 얼마나 다르다는 거죠?

3.

여주인공 로라는 우연히 호텔 밖으로 나왔다가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에 섞여들어갑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미국인도 아웅산 수지에 대해 아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로라는 모르죠. "그녀는 정말 용감한 사람이에요. 우리 나라를 민주화시켜 줄 겁니다!" 로라를 끌어올린 시민이 외쳐요. 근데 로라의 대답은 사뭇 엉뚱합니다. "네, 그리고 참 아름답군요."

엉뚱하다고? 글쎄요. 사실 아웅산 수지는 상당한 미인이고 그런 그녀가 [타임]지 같은 잡지에 표지로 나오면 그녀 뿐만 아니라 미얀마 사태 자체가 대단히 비장한 아름다움을 풍깁니다. 그러고보니 바로 다음 장면 이 생각나네요. 아델 루츠가 연기한 아웅산 수지가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 앞으로 걸어가고 군인들은 덜덜 떨면서 총부리를 옆으로 돌립니다. 군인들의 모습이 좀 바보 같아보이는 게 탈이긴 해도 이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죠.

인상적인 정도만이 아닙니다! 사실 이 장면은 버마 사태에 대해 로라가 알고 있는 거의 전부입니다. 감히 고상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못된 군인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거죠. 사실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어맨이 영화를 다루는 방식도 로라의 입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어맨은 아마도 사실을 그리려고 했겠지요. 그러나 그가 그려내는 미얀마는 오리엔탈리즘에 푹 젖어있고 그가 그려내는 미얀마 인들도 양극으로 벌어져 있습니다. 한쪽에는 서양 여자를 강간하려는 치사한 악당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신비스러운 동양의 지식으로 무장한 고매한 선비와 시적인 비극성으로 장식된 고상한 귀부인이 있지요. 결국 영화는 미리 준비된 전형화된 이야기를 따라가고 그 결과 미얀마 사태라는 엄청난 사건은 그 차별성을 잃고 맙니다.

4.

패트리샤 아퀘트는 좋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엔 힘이 부족하고 가끔 모험물에 등장하기엔 너무 멍해 보이지만 가족을 잃고 엉뚱한 나라의 폭력 사태에 말려든 여자가 너무 또렷해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퀘트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로라 보먼이라는 캐릭터를 매끈하고 설득력있게 표현해냈습니다. 그 사람의 갈색 단발 머리도 원래 헤어스타일보다는 낫더군요. 특유의 멍한 얼굴을 보다 짜임새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역할이 너무나 적어서 우리는 조금 슬펐습니다. 이 배우는 좀 더 대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우 아웅코는 세상살이의 경험이 풍부한 아마튜어가 종종 그러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움없는 신선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 사람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조연들과 엑스트라들의 연기는 너무 뻣뻣하고 과장되어 있어서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5.

[비욘드 랭군]은 괜찮은 모험 영화입니다. 로라가 아웅코를 치료할 약을 구하는 장면은 박진감 넘치고 나머지 부분도 꽤 그럴 듯합니다. 로라를 엄청난 영웅으로 만들지 않은 것도 설득력 있습니다. 그녀의 행동도 꽤 당위성이 서 있고요. 존 실이 찍어낸 미얀마(사실 말레이지아에서 찍었지만)도 이런 축축한 모험물에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부어맨은 그 이상이 되기를 바랬고 영화 자체도 그걸 요구하고 있으니 이건 정말 문제입니다. 아마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이 영화도 [보물섬] 같은 로맨틱한 모험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96/07/17)

D&P

기타등등

이 글은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파고]로 아카데미 상을 받기 전에 쓰여졌습니다. 더 이상 저희가 '슬플' 필요는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