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미이케 다카시 Takashi Miike

주연
이시바시 료....아오야마 시게하루
Ryo Ishibashi....Shigeharu Aoyama
시이나 에이히....야마사키 아사미
Eihi Shiina....Asami Yamazaki
사와키 데츠....아오야마 시게히코
Tetsu Sawaki .... Shigehiko Aoyama
쿠니무라 준....요시카와 야수히사
Jun Kunimura....Yasuhisa Yoshikawa
이시바시 렌지....휠체어를 탄 노인
Renji Ishibashi....Old man in wheelchair
마츠다 미유키....아오야마 료코
Miyuki Matsuda....Ryoko Aoyama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디션

미이케 다카시의 [오디션]은 처음부터 무라카미 류의 동명 원작을 읽을 때보다 충격의 효과가 조금 적을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영화라는 매체, 특히 호러 영화라는 장르에서 이야기의 성격을 노출시키지 않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오디션]처럼 이야기가 중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환하는 영화는 시작부터 어느 정도 반전의 힘을 놓치기 마련이죠. 위의 포스터를 보세요. 주사기를 든 여자 주인공의 모습에서 뭔가 불길하고 폭력적이며 SM적인 느낌이 들지 않나요?

포스터만 보고 극장에 들어온 호러 영화 관객들은 영화 중반까지 실망할 겁니다. 자극적인 폭력과 섹스를 보러왔는데, 이야기는 중년 남자의 잔잔한 러브 스토리이니 말이에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7년 전에 아내를 잃고 아들과 함께 혼자 살고 있는 중년 남자인 아오야마 시게하루입니다. 결국 재혼해서 새출발을 하기로 결심한 그에게 흥미로운 기회가 찾아오죠. 자신과 관련된 영화의 주연 배우 오디션을 하면서 그 중 미래의 아내감을 고를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는 그 중 전직 발레리나였던 야마사키 아사미에게 끌리게 되는데... 문제는 얌전하고 이상적인 아내감처럼 보였던 아사미가 심각할 정도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는 아주 얌전하게 시작합니다. 중반을 넘어 '자루'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호러 영화라는 티를 내지도 않죠. 영화는 그저 20대의 젊은 여자에게 반한 중년 남자의 연애담입니다. 그게 중반 이후를 넘어가면 슬슬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풍기게 되고 아사미가 시게하루의 집으로 쳐들어가는 후반 30분부터는 순수한 그랑 기뇰식 고문극이 됩니다. 이런 식의 전개는 주로 극도의 자극을 추구하는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조금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이건 감독의 적극적인 의도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기작가의 유명한 원작에 충실한 결과일 겁니다.

이런 접근법은 관객들에게 먹힐 수도 있고 먹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장르 영화팬들은 보다 자극적이고 속도가 빠른 영화를 기대할테니 후반까지는 상당한 참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일단 그 안전한 페이스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겐 후반부의 충격이 더 강렬하게 느껴질 수 있죠.

얼핏보면 극단적인 결합처럼 느껴지지만 초반부의 멜로드라마와 후반부의 호러는 비교적 치밀한 논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아오야마 시게하루가 아직도 죽은 아내에게 품고 있는 애정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동안 느끼는 죄책감을 상당히 설득력있게 보여주는데, 이 모든 것들은 후반부에 나오는 악몽의 동기를 설명해줍니다. 영화는 온화한 멜로드라마에서 고문극으로 변하는 중간단계를 데이빗 린치식 악몽으로 채워넣는데, 그건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게하루의 의식과 무의식에 의해 통제되고 재해석된 버전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완벽하게 맞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진짜로 재미있는 것은 얌전한 여성성과 극단적인 변태성이 결합된 듯한 일본식 여성관입니다. 과거를 잊고 평범하고 마음이 통하는 여자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하는 시게하루의 동기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 큰 아들이 있는 중년 남자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데 모험을 원치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러기 위해 '아내 오디션'이라는 술수를 쓰게 되면서 이야기는 조금씩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에게 만신창이가 된 아사미의 과거를 알게 된 뒤부터는요. 사실 시게하루의 행동은 얌전하고 로맨틱해보이기까지 하지만 여자들을 저울질하는 잣대와 방식은 아사미가 거쳐간 다른 남자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폭압적이거든요. 이런 식의 억압적 사회가 그렇듯 둘은 늘 하나로 연결되는 겁니다. 그 때문에 시게하루가 아사미에게 고문을 당할 때는 동정심과 함께 "그럴 줄 알았다. 쌤통이네."하는 생각도 함께 드는 거랍니다.

여기서부터 [오디션]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을 위한 나쁘지 않은 텍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자동적으로 페미니즘 영화로 넘어가는 건 아니에요. 그러기엔 시점이 지나칠 정도로 남성위주로 고정되어 있고 아무리 쓸만한 분석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잠재적인 여성혐오를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런 이런 관점을 무시하고 이 영화를 볼 수도 없겠죠. 핵심이 되는 양성의 파워 게임을 잊는다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고문 장면의 잔혹함("키리키리키리...")도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든요. (03/12/22)

DJUNA

기타등등

1. 전에 클리셰 사전에서 '그래도 개는 산다'를 다룬 적 있는데, 사실 호러 영화에서는 다른 법칙이 더 잘 통합니다. 호러 영화에 개가 나온다면 그 개는 언젠간 죽는다는 것이죠.

2. 왜 전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신동엽, 김원희의 [헤이헤이헤이]에 나오는 [웃자 웃자] 코너가 자꾸 떠오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