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로베르트 도른하임 Robert Dornhelm

주연
한나 테일러-고든....안네 프랑크
Hannah Taylor-Gordon....Anne Frank
벤 킹즐리....오토 프랑크
Ben Kingsley....Otto Frank
브렌다 블리신....아우구스트 반 펠스
Brenda Blethyn....Auguste Van Pels
타티아나 블라처....에디트 프랑크
Tatjana Blacher....Edith Frank
요아킴 크롤....헤르만 반 펠스
Joachim Król....Herman Van Pels
제시카 맨리....마고 프랑크
Jessica Manley....Margot Frank
닉 오즐리....페터 반 펠스
Nick Audsley....Peter Van Pels
얀 니클라스....프리츠 페퍼
Jan Niklas....Fritz Pfeffer
릴리 테일러....미에프 기에스
Lili Taylor....Miep Gies

1.

프랑크 가족

ABC의 4부작 미니 시리즈 [안네 프랑크]는 만들어지기 전부터 말이 많았던 작품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 작품의 원작이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아닌 멜리사 뮐러가 쓴 안네 프랑크의 전기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이 안네 프랑크의 기존 이미지를 손상시켰다고 믿은 스위스의 안네 프랑크 재단은 전기의 판권을 구입한 스티븐 스필버그와 드림웍스 텔레비전에 상당한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 결과 싸움을 두려워 한 스필버그는 중도하차했고, 시리즈는 ABC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 디즈니 작품이 된 거예요.)

ABC 미니 시리즈도 저작권 문제 때문에 상당한 애를 먹었습니다. 일기의 판권을 가진 안네 프랑크 재단에서 일기의 인용을 허용하지 않았으니까요. 덕택에 [안네 프랑크]는 안네 프랑크가 주인공이면서 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아주 별난 시리즈가 되고 말았어요.

일기의 부재는 작품에 꽤 눈에 뜨이는 손톱 자국을 남겼습니다. 재단이 조금이라도 더 융통성을 발휘했다면 이 작품은 훨씬 좋은 시리즈가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니 시리즈 [안네 프랑크]의 목적은 [안네의 일기]를 다시 각색하는 것이 아니라 [안네의 일기]의 저자이며 네덜란드 문학의 최대 스타인 안넬리제 마리 프랑크의 전체 일생을 새롭게 조망하는 것이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건 작가이지 작품이 아닙니다. 꼭 일기가 중심일 필요는 없는 거죠. 이미 일기를 각색한 작품들도 많으니 일기가 그립다면 그 작품들을 보면 되겠고요.

2.

안네와 페터

[안네 프랑크]는 여러 면에서 이전의 안네 프랑크 영화들과는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작품이 다루는 시간대입니다. 대부분 영화들은 안네와 가족들이 은신처에서 보낸 2년 동안의 이야기만을 다루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은신처 장면은 이야기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이나 은신처 이전과 이후의 이야기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지요. 특히 후반부의 베르겐-벨젠 수용소 묘사는 오히려 은신처 장면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올 정도입니다.

은신처 장면들도 이전 영화들보다 훨씬 사실에 가깝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나온 각색물들은 대부분 프랜시스 굿리치와 앨버트 해켓의 브로드웨이 연극을 각색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재현에는 신경을 덜 쓴 편이지요. 이 작품은 일기 자체를 인용하지 않는 대신 일기와 전기에 나오는 디테일들을 상당히 정확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안네의 생일 파티에 틀었던 영화에서부터 일기책의 모양, 은신처의 디테일까지 너무나도 정확해서 일기와 그밖의 저술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숨은 그림 찾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은신처 사람들이 모두 본명을 돌려받은 것은 물론이고요. 이런 디테일을 깨는 것은 이 작품이 어쩔 수 없는 영어 시리즈라는 것인데... 그 정도는 이해해주어야 할 것 같군요.

주변 묘사도 확대되었습니다. 은신처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미에프 기에스, 안네의 친구였던 자키와 같은 인물들이 보다 큰 비중으로 등장하고 있고, 은신처 사람들을 게쉬타포에 고발한 밀고자가 누구인지도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밝히고 있어요.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안네 프랑크의 묘사입니다. 이 작품의 안네는 이전의 각색물에 등장하는 안네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입니다. 물론 이전 각색물들이 조심스럽게 덮어놓았던 안네의 단점들도 별로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밝히고 있죠. 이 작품의 안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안네처럼 영리하고 섬세한 틴에이저이기도 하지만 허영심이 강하고 건방진 말썽쟁이이기도 합니다.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죽어가는 안네의 모습도 이전의 각색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죠.

안네 프랑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분들에겐 이런 접근법이 그렇게까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을 겁니다. 일기가 출간된 뒤부터 한동안 홀로코스트 성인 취급을 받던 안네를 하나의 자연인으로 돌려놓으려는 시도는 몇 년전부터 꾸준히 있어왔으니까요. 존 블라이어의 다큐멘터리인 [안네 프랑크를 추억하며], 멜리사 뮐러의 전기 그리고 이 작품 [안네 프랑크]는 모두 그런 시도의 일부인 것입니다.

일종의 우상 파괴일까요?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당연한 흐름이지요. 게다가 우리가 안네의 자잘한 단점들을 몇 개 더 알았다고 해서 이 친구에 대한 애정이 쉽게 날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기존 일기만 읽어도 이 친구의 성격은 어느 정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안네가 죽어가면서 그 유명한 낙천주의를 포기했다고 해서 우리가 실망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도대체 수용소에서 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서서히 티푸스로 죽어가던 소녀한테서 무엇을 더 기대한단 말이에요?

3.

마고의 죽음

[안네 프랑크]는 야심찬 계획이지만 자의식 과잉인 작품은 아닙니다. 루마니아 출신인 로베르트 도른하임은 소재를 충실히 묘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듯 해요. 하긴 이런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재가 되는 이야기이니 더 이상 나갈 필요까지는 없겠죠.

주연 배우들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역시 안네를 연기한 한나 테일러-고든입니다. 테일러-고든은 지금까지 안네를 연기했던 배우들 중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선 종종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네와 닮았어요. 밀리 퍼킨즈나 멜리사 길버트는 20대 중반에 안네를 연기했지만, 테일러-고든은 14살로, 안네의 실제 나이와도 맞습니다. 결정적으로 테일러-고든의 안네 연기는 정말로 훌륭합니다. 날카로운 위트와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무척이나 감동적이예요.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더군요. 이 친구에게 기회를 주면 뭔가 터뜨릴 줄 알았습니다.

오토 프랑크 역의 벤 킹즐리도 테일러-고든의 뒤를 완벽하게 받쳐주는 훌륭한 조연입니다. 조연의 위치를 잘 지키면서도 위엄있고 진솔해요. 그들에 비하면 브렌다 블리신이나 요아킴 크롤과 같은 배우들은 비교적 평면적입니다. 하지만 실제 반 펠스 부부가 그렇게 깊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아요. 전체적으로 볼 때 모두 각자의 일을 했다고 봅니다.

[안네 프랑크]는 안네 프랑크 영화의 '결정판'은 아닙니다. 그러기엔 일기의 부재가 남긴 흔적이 너무 크죠. 그러나 [안네의 일기]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 자체로 훌륭한 드라마이기도 하고요. (02/03/04)

DJUNA

기타등등

1. 자잘한 디테일을 칭찬했지만 꼭 맞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페터의 고양이 무치는 제가 알기론 검은 고양이였어요. 안네의 일기도 다시 쓴 종이 빼고도 몇 권 더 있어야 할 거고요.

2. 한나 테일러-고든은 전작인 [제이콥의 거짓말]에서도 수용소에 들어간 적 있습니다.

3. 학교 졸업하고 [안네의 일기]를 읽어보신 분 계신가요? 가끔 얼마나 많은 성인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지 궁금해하곤 합니다. 전 꽤 일편단심인 독자라서 옛날에 좋아했던 책들에 대한 기억을 꽤 오래 끌고다니는 편이긴 합니다만. 아직도 이 친구 관련 책들이 제 책장 한 칸의 반을 차지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