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고 (1993) * *

감독
윤명석

주연
이경영....두한
김미미....록희








두한과 록희
제목이 [가면고]이긴 하지만, 윤명석의 이 영화는 최인훈의 동명소설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카피 제목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군요. 저는 우연 같지만 또 모르죠. 시나리오의 원제가 [무책임한 이주일]이었다고 어디서 들은 기억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세상에 적응 못하는 30대의 샐러리맨 두한입니다. 직장을 땡땡이 치고 시골을 쏘다니던 그는 우연히 대학생 록희를 만나게 되지요. 둘은 사랑 비슷한 것에 빠지고 느끼한 대사를 좀 읊다가 연애에 돌입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우연히 살인사건을 목격한 두한이 재수없이 용의자로 몰렸기 때문이죠. 경찰은 그의 뒤를 쫓고 두한은 애꿎은 록희를 보름 가까이 끌고다니며 진범을 찾으러 다닙니다.

구닥다리 설정이지만 나쁘지는 않죠. 잘만 다루었다면 꽤 괜찮은 히치콕 아류작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겁니다. 중급 이상의 스릴러를 만들만한 재료들이 다 있어요. 물론 그렇게 정공법으로 돌파했다면 [서편제]를 밀어내고 청룡영화상 대상을 받는 일은 없었겠죠.

[가면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단순명료한 스릴러 물의 재료를 가지고 뜬구름 잡는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아트하우스 영화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단순한 이야기인데도 영화는 괜히 '급변하는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사랑의 의미가 뭔지 탐구'하겠다는 실없는 짓이나 하고 있어요. 암만 들여다 봐도 '가치관의 변화'에 대한 두한의 헛소리는 "난 나보다 일 잘하는 후배들이 싫고, 나한테 눈길 안 주는 요새 여자들도 싫어!"의 두 문장으로 요약되니 말이죠.

웃기는 건 바로 그런 벙찐 태도 때문에 이 영화가 당시 지독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 약발은 비교적 쉽게 떨어져 나갔죠. 요새 누가 [가면고]를 기억하나요? 제가 알기로는 DVD로도 나와있지 않아요.

이 영화는 작품 자체보다 그 뒤에 있었던 스캔들이 더 유명합니다. 알고 봤더니 임병석(그는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각본상을 받고 며칠 뒤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이 쓴 영화의 각본은 소위 '추억의 영화' 팬들에게 익숙할 법한 옛날 영화들에서 거의 모든 대사를 가져와 엮은 것이었죠. '가면고 대사'로 검색해보시면 인터넷에 비교자료들이 꽤 많이 뜰 겁니다. 윤명석은 지금까지도 자긴 몰랐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지만 암만 생각해도 그게 참말일 리가 없어요.

좋게 보면 일종의 포스트모던한 장난인데, 이걸 알고 영화를 보면 꽤 재미있긴 합니다. 구닥다리 옛날 영화들의 친숙한 대사들이 정말 엉뚱한 부분에서 재활용되고 있으니 말이죠. 예를 들어 영화는 큐브릭의 [스타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가 바리니아를 꼬실 때 사용한 대사를 가져와 록희에게 주어 두한을 보고 읊게 하는데, 이게 제대로 먹힐 리가 없죠. 그냥 어색하고 괴상한 겁니다. 하지만 대사의 출처를 알고 보면 [가면고]의 억지 대사와 억지 설정의 원인이 파악되어 여기에 훨씬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여전히 엉터리 대사지만 그 정도만 한 것도 대단한 거죠.

[가면고]의 또다른 재미는 '추억의 영화' 팬들 특유의 작품선정입니다. 시네마테크와 DVD 이전 시대를 산 '추억의 영화' 팬들에겐 그들만의 독특한 리스트가 있죠.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라스트 콘서트]의 초반 장면이 꽤 중요한 재료로 등장하는데요, 요새 이 영화를 진지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은 일본과 우리나라밖에 없지 않을까요? (08/04/01)

DJUNA


기타등등

록희를 연기한 김미미는 이 영화 이후 한동안 뜸하다가 갑자기 박철-옥소리 스캔들에 얽혀 언급되더군요. 윤명석도 [가면고] 이후 조용하다가 저번 감독협회 소동 때 정인엽 옆에 서서 "영진위 해체하라!"를 외치고 있더라고요. 그 동안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