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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99년 12월 18일

내용

신체검사가 있는 날, 민아(김민선)는 늦은 아침 등교길의 수돗가에서 빨간 표지의 노트를 줍는다. 글씨와 그림으로 빽빽이 채워진 노트는 커플로 소문난 효신(박예진)과 시은(이영진)의 교환일기. 작년에 민아와 같은 반이었던 효신은 조숙한 언행에다 국어 선생과의 수상한 소문으로 따돌림당하는 아이다. 민아와 몰려다니는 지원과 연안도 효신을 싫어한다. 민아는 양호실 침대에서 일기를 읽다가 옆자리에 누워 있던 효신과 그를 찾아온 시은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만난 지 1년이 되는 ‘공동 생일’을 맞은 두 소녀는 한달 전 다툼 이후 계속된 침묵을 깨고 둘만의 장소였던 학교 옥상에서 재회한다. 일기장을 넘길수록 주술에 걸린 듯 상상을 통해 점점 효신과 시은의 애절하고 비밀스런 관계 안으로 빠져드는 민아. 오후가 되어 신체검사로 어수선하던 학교는 옥상에서 투신한 효신의 죽음으로 발칵 뒤집히고, 효신에게 사로잡힌 민아는 그녀의 그림자를 계속 밟아나간다.

정보

그런 날들이 있었다. "네가 없었다면 벌써 자살했을 거야"라는 말을 서슴없이 던지던 때가. 자라서는 연인에게조차 입 밖에 못낼 대담한 고백을 수백번 속삭이고도 성에 차지 않아 온종일 붙어다닌 단짝에게 다시 편지를 쓰던 시절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소녀가 소녀를 만난 첫사랑의 비극적 기록이다. 난청으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육상부원 시은과 가끔 이상한 소리를 듣는 중창반 반주자 효신. 또래들의 명랑한 공기를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그들은 둘만의 방을 짓고 빗장을 지른다. 하지만 서로의 다리를 묶고 고요한 물 속에 잠겨 있던 두 소녀 중 하나가 짝을 뿌리치고 수면으로 떠오르는 영화 도입부대로 , 언약은 깨어진다. 효신의 지독한 애정으로 봉인된 '밀실'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시은은 "뭇사람 앞에서 연인에게 등돌 리지 말라"는 사랑의 첫 번째 계율을 어긴다.

우리 스크린에서 소외되어 온 10대 소녀들의 공간을 매혹적인 영화 소재로 발견한 전편에 이어, 속편은 괴담보다 일기에 가까운 문체로 여고생들의 하위 문화에 관한 보고서를 쓴다. 감독과 연출부가 6mm 카메라를 들고 채록했다는 10대 소녀들의 일상이 녹아 든 디테일에서는 과연 '진짜배기' 냄새가 난다. 예컨대 "세상에서 새가 제일 싫어!" 같은 단순한 대사,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되니?” 하며 투닥이는 조연들의 연기는 여성 관객의 무릎을 치게 한다. 대체 어디에 쓰일까 궁금하게 만들던 문구점의 수많은 필기구와 예쁜 스티커들도 소녀들의 소통 채널인 일기장 속에서 참된 쓰임새를 드러낸다. 잘 모르는 친구의 자살에 너도나도 통곡하고는 금세 속살대며 간식을 먹는 아이들의 모습도 얄밉거나 슬프기 이전에 그저 생생하다.

한편 여인 같은 소녀 효신과 소년 같은 소녀 시은의 캐릭터는 사회가 10대 여자애들에게 주는 스트레스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를 지키려면 다른 하나를 위반하기 십상인 청소년의 규범과 여성적 규범 틈새에 끼어 있는 10대 소녀들은, 흔히 서둘러 성숙한 여자가 되거나 남자를 닮는 방식으로 숨통을 트려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고괴담 두 번째…]는 '여고'를 전편보다 훨씬 중요한 키워드로 구사하면서 색다른 여성영화로도 발돋움한다.

[서울 예수] (선우완, 장선우)를 제외하면 국내 장편영화의 첫 공동 연출 사례인 김태용, 민규동 두 신인감독의 협업은 기대 이상이다. 종종 톤을 뒤집는 촬영 기법, 환각과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시점, 웃음, 공포, 비애가 어우러진 정조는 관객의 관람 체험에 균열을 내지만 그 틈에서 묘한 영화적 추진력을 길어 올린다.

이 영화에는 삐걱대는 마룻장도 교실 벽을 타고 흐르는 피의 커튼도 없다. [캐리]의 무도회 장면을 연상시키는 클라이맥스에서도 정작 의도된 것은 공포나 쇼크 효과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선생들은 속되고 아이들은 유치할지언정 학교는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효신의 자살을 둘러싼 소문의 주인공인 선생마저도 자기 짐에 짓눌린 가엾은 남자일 뿐 악인은 아니다. 결국 [여고괴담 두 번째…]는 교육 제도를 '적'으로 선명히 지목한 전편과 달리, 삶의 모든 시기가 그렇듯 10대 시절의 괴로움도 하나의 절대악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속깊게 짚어내면서 청춘영화의 경계를 넘어선다.

모든 맹세가 그러하듯 사춘기의 '반쪽'을 향해 피어올랐던 불꽃도 촛농만 남기고 사그라든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한번쯤 치르는 열정의 기억을 개켜 보관하고, 인생의 다음 모퉁이로 종종걸음친다. 그러나 사랑에 안녕을 고하는 법을 모르는 어떤 아이들은 삶이 안겨준 첫 실연의 아찔한 심연 속으로 투신한다. 태양을 보고 나서 눈이 멀 듯이, 순정을 맛본 뒤 거짓이 즐비한 현실로 돌아 올 수 없었던 아이들. [여고괴담 두 번째…]의 진혼곡 속에서 우리는 그 아이들의 울음 소리를 듣는다.

김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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